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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 수문장 교대의식을 통하여 본 조선전기의 무기(武器)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12-11 조회수 : 3355

 

2002년부터 11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은 조선시대 왕실호위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통문화 재현행사다. 예종 1년(1469)의 「수문장제도 설치」 기사를 사료적 근거로 하여 재구성된 이 행사는, 복식 및 무기 등을 복원하여 15세기 조선전기 중앙군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지키고 있는 당당한 수문장의 모습처럼, 조선전기의 중앙군(京軍) 역시 철저한 무장을 갖추고 각자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던 조선을 대표하는 정예병이었다. 본 글에서는 조선전기의 무기들을 집대성한 『세종실록 오례의(五禮儀)-군례(軍禮)/병기(兵器)』를 근거로 복원된 수문장 교대의식의 무기들을 통하여, 조선전기 당시 군인들이 사용하였던 무기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도검(刀劍)의 종류로 『오례의』 에서는 환도(還刀)와 운검(雲劒), 장검(長劍)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자루가 짧은 무기는 환도와 운검으로, 환도는 군인들이 보편적으로 패용(佩用)하는 무기를 지칭하고, 운검은 국왕 가까이에서 시위(侍衛)하는 자가 지니는 의장(儀狀)용 성격이 강한 무기를 말한다. 조선전기의 도검은 날이 곧은 직도(直刀)와 날이 휜 곡도(曲刀)의 형태가 혼용되어 나타나는데, 곡도의 경우 고려후기에 원(元)의 문화가 유입되어 조선왕조에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장 교대의식에서는 조선전기의 특색을 지니고 있는 짧은 길이의 환도를 복원하였으며, 수문장을 비롯한 모든 병종(兵種)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로써 패용(佩用)하고 있다. 조선 초에는 군기감(軍器監)에서 제작하는 환도의 규격이 제도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아 혼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문종 1년(1451) 이징옥(李澄玉)의 의견을 받아들여 환도를 칼날이 짧은 직도 형태의 규격(보병용: 약 54cm / 기병용: 약 50cm)을 제도적으로 정하였다. 하지만 지역별로 환도를 사용하는 군인들이 각자의 편의에 맞게 날의 길이를 마음대로 변형시키는 일이 흔해 환도의 규격을 완전히 표준화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환도의 길이가 임진왜란 이전까지 계속 짧아져 조선중기 무렵에는 호신용(護身用) 또는 의례용으로까지 변화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환도의 가장 큰 특징은 환도의 패용 방식과 그 용도에 있다.

 

환도에는 기본적으로 사용자가 패용하기 편리하도록 칼집에 고리(環)가 달려 있는데, 여기에 ‘띠돈’이란 보조 장비를 활용하여 끈을 묶은 뒤 칼자루를 뒤로, 칼날은 앞으로 향하게 하는 독특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군인들이 패용한 환도 때문에 활을 사용할 때 생기는 불편함을 최소화시키기 위한 것과 관련이 깊다. 물론 이러한 패용방식은 칼자루가 착용자의 후방으로 향하기 때문에 위급상황 시 신속하게 대처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으나, 앞서 언급한 ‘띠돈’은 패용한 환도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게 함으로써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장검과 대도는 긴 자루를 가진 무기로 장검은 길이가 창(槍)보다 짧고 환도보다는 긴 편이다. 수문장 교대의식에서는 정병(正兵)이 장검을, 갑사(甲士)가 대도를 사용한다. 장검과 대도는 긴 자루 끝에 날이 달린 무기이기 때문에 흔히 창의 종류로 혼동하지만 창이 자루의 긴 길이를 이용하여 찌르는 방식의 무기라면, 장검과 대도는 근거리에 접근한 적을 환도보다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서 쳐내거나 베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장검이나 대도와 같이 자루가 긴 무기들은 환도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생기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명칭과 형태가 변형되긴 하지만 조선후기에까지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주력무기로 쓰이게 된다.


활(弓)은 조선 전·후기를 막론하고 가장 폭넓게 활용되었던 무기다. 단순하게 무기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무인(武人)들의 기본소양이자, 유교적 사회였던 조선사회의 사대부(士大夫)들에게도 정신수련의 한 방법으로 중요시되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널리 애용되었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활은 각궁(角弓)이다. 각궁은 크기와 제작에 필요한 재료에 따라서 종류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종 시기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주재료인 물소 뿔을 구하기 어려워 민가의 부담이 날로 가중되는 부작용이 심했으므로, 이후에는 재료를 국내에서 조달하기 쉽게 개량한 목궁(木弓)과 죽궁(竹弓) 그리고 전투용 철궁(鐵弓)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편전(片箭=애기살)’이란 작은 화살은 한국 활의 독창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 길이가 짧지만(약 25cm) 매우 긴 사거리와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활의 위력으로 조선은 당시에 운용하던 기병(騎兵)의 반 이상을 궁(弓)기병으로 편제하였고, 왜구와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활을 신체에 휴대하여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활주머니인 궁대(弓帒 혹은 동개)와 화살을 보관하는 ‘시복(矢腹)’, 그리고 손가락을 보호하는 ‘깍지’가 필요하였다. 궁대와 시복을 장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수문장 교대의식의 경우 궁대를 환도와 함께 허리 쪽에 고정하고 시복은 착용자의 등 아래쪽에 고정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사용자가 궁대에서 활을 꺼내 쓸 때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띠돈을 이용하여 환도를 뒤쪽으로 향하게 패용한다. ‘깍지’는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가 놓을 때 발생하는 힘 때문에 사용자가 부상을 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도구로, 엄지손가락에 끼워서 활용한다. 수문장 교대의식에서도 활을 장비하는 병종에 한하여 엄지손가락에 깍지를 장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창(槍)은 매우 긴 자루 끝에 날을 단 무기로서 크게 창(槍), 모(矛), 극(戟), 과(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보통 TV 매체에서 날이 세 갈래로 나 있는 당파(鐺鈀)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창으로 등장하지만 사실 당파는 임진왜란 이후 명(明)나라에서 유입된 무기 중 하나로, 조선전기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수문장 교대의식에서는 창과 원방패(圓防牌)를 복원하여 대졸(隊卒)이 장비하고 있다. 조선전기의 창은 자루만 3m에 이르는 무기로 당시 조선군이 운용하는 모든 무기 중 길이가 가장 긴 무기에 속하였으며, 긴 길이를 이용하여 적을 상대하는 데 매우 유리하였다.조선후기와 달리 기병이 쓰는 기창(騎槍)과 보병용 장창(長槍)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며 임진왜란 이전까지 혼용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창은 길이 때문에 민첩하게 다루기 매우 어려웠으므로 단독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하기에는 취약하였다. 따라서 주로 진형(陣形)을 갖춰 집단으로 전법(戰法)을 구사하였다. 문종 때 완성된 조선전기의 군사병법인 『오위진법(五衛陣法)』에서는 조선군이 진형을 갖출 때 ‘팽배(彭排=방패)-장창(長槍)-총통(銃筒)-살수(殺手)’ 순으로 배치하여 진형을 갖추도록 기술하고 있으며, 세조 10년(1464)에 전투 시에 장창(長槍)을 결진(結陣)시켜 진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 양성지(梁誠之)를 토대로 볼 때 창은 단순한 살상용 무기에서 벗어나, 조선군의 전술과 진형(陣形)을 단단히 갖추는 요소이자 중거리에서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소개된 도검, 활, 창 이외에도 『세종실록 오례의』에서는 타격무기인 ‘차복(車輻)’과 의장용으로 사용된 월(鉞), 각종 방패와 의장기(儀仗旗) 등 조선전기 군례와 관련된 문물을 나열하고 있다.

 

 

오늘날 수문장 교대의식이 배경으로 삼아 재현하고 있는 조선전기의 무기체계는 조선왕조 건국과 동시에 갑자기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다. 이전 고려시대의 무기체계를 바탕으로 더욱 공고히 구축한 결과물이다. 이후 왜란과 호란 등 외적의 침입에 의해 국가적인 위기를 맞으며 문치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정체되었던 무기체계가 다시금 개량, 발전되어 영·정조(英·正祖) 대에 이르러서는 조선후기 무기체계가 완성되게 된다.


| 참고자료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오례의」
•강성문, 「조선시대 도검의 군사적 운용」, 한국대학박물관협회, 2002.
•박환수, 「세종의 국방 및 군사분야 업적에 관한 연구」,
대전대학교, 2004.
•심승구, 『조선시대 궁성문 개폐와 수문장 교대의식 연구』,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2.
•이병민, 「한국의 궁도에 관한 연구」, 동아대학교, 2000.

 

글˚문화예술실 문화진흥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