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5세 때를, 이애주는 춤 인생의 첫 경력으로 삼고 있다. 그에게 다섯 살은 1954년에 스승 김보남을 만나 춤을 정식으로 배우기 이전부터 몸에서 우러나와 순수 자연 춤을 추던 시기를 상징한다. 그로부터 춤 인생 60년을 맞은 이애주는 말한다. “진짜 춤이란 무지렁이이건 명무이건 간에 고달픈 삶을 살아온 모든 사람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자연스런 몸짓, 자연의 춤입니다.” 돌아보면 불과 3,40년 전만 해도 공동체의 삶 속에는 춤이 살아 있었다. 민요가락 하나에 어깨춤 덩실거리며 신명을 내고, 시름을 풀던 백성들에게 삶은 곧 춤이었다. 그 춤이 언제부터인가 춤꾼만의 것이 되고 말았다. 생명의 움직임 자체가 춤이라 믿는 이애주는 삶과 춤 사이에 쌓인 장벽을 허무는 일로 60년을 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창덕궁 옆 국립국악원에서 전통 춤의 기본을 공부했다. 창덕여고 3학년 때 무용협회 주최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서울대에 진학했다. 대학 4학년 때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 예술상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자 심사위원이던 한영숙 명인이 그를 불러 제자로 삼았다. 김보남, 한영숙 모두 구한말 최고의 예인이던 한성준의 제자들이다. 승무는 우리 춤 가운데 처음으로, 1969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27호로 지정되었다. 한영숙의 맥을 잇는 이애주는 1996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승무분야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이 땅을 대표하는 춤 승무는 정중동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국 몸짓의 상징이자 기본이다.
한국 춤 가운데 절제미를 가장 잘 간직한 춤이 승무다. 더구나 우주와 인간의 삶을 풀어내는 대승적 움직임에 닿아 있는 이애주의 승무(僧舞)는 그래서 승무(乘舞)이기도 하다. 특히 스승 한영숙의 맥을 이어 군더더기가 없다. 그저 터억하니 팔 하나 올렸을 뿐인데 담백하고 위엄 있고 멋스럽다. 24개국 해외순방 공연을 떠난 것은 국립무용단 시절이던 1971년이었다. 유럽의 평론가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너희가 왜 서양 춤을 흉내 내느냐고 물어왔다. 충격이었다. 귀국하던 맡에 무용단을 탈퇴한다. 우리 춤의 전통을 찾아 헤맨 끝에 이애주 춤판이란 제목으로 1974년에 공연을 가졌다. 격 있는 단어 ‘무용’ 대신 질 낮은 단어 ‘춤’+‘판’을 썼다며 무용계의 반발이 있었다. 무용이야말로 일제 잔재 용어이고, 역사 이래 백성들이 써 온 말이 춤이라는 게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이고 보면, 그는 꽤 앞서 가는 삶을 산 듯하다. 1987년 학교 제자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세상을 떴다. 제자의 넋을 달래려고 맨발로 달려 나갔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죽은 이가 소생하는 춤을 추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춤으로 보였다. 바람맞이춤이었다. 이번엔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세상을 떴다. 장례식에서 ‘한풀이춤’을 추었다. 압제의 시대, 그의 춤을 원하는 곳은 차고 넘쳤다.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진혼의 춤, 상생의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그의 춤을 ‘시국 춤’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주검 앞에서 추었던 춤, 역사의 현장에서 추었던 춤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운동권 춤꾼’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실 그가 추어 왔던 전통 춤이나 역사의 현장에서 추었던 거리 춤도 모두 자연 속에서 자연의 법도대로 춘 춤꾼의 ‘자연스러운 춤’이었을 뿐이다. 12년 동안 ‘우리 땅 터벌림’ 작업을 시작했다. ‘터벌림’은 태평무 터벌림춤에서 따온 말이다. 몸의 중심을 바로 잡고 그 기운을 ‘사방치기’로 넓혀보자며 시작한 주제였다. 말 그대로 ‘사방팔방으로 터를 벌리며 뻗어나가는 것’으로 정신세계의 우주적 확산까지도 의미한다. 민족적인 한을 풀어내고 치유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터벌림은 1999년 백령도에서 시작하여 울릉도, 독도, 제주도, 마라도, 백두산, 광개토태왕릉비, 압록강, 태백산을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강화 마니산 첨성단에서 프로젝트를 마감했다. 하나같이 민족적 정기가 흐르는 상징적 장소들이었다. 웅장한 자연 속에 몸을 담갔더니 물과 땅과 바람이 그의 춤과 하나 되었다. 이애주는 우리 춤의 뿌리를 찾아 바이칼호수 주변까지 찾아다녔다. 고구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춤의 원류를 연구, 고구려 춤을 재현하면서 역사의 맥을 잇는 이 시대의 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주역을 비롯한 동양고전 연구에 몰입하면서 민족문화의 이론을 정립하고, 춤의 지평을 넓힌 이애주는 우리 춤을 대동 4무(舞, 巫, 武, 無)로 이야기한다.

“무(舞)는 마음과 몸, 기(氣)가 하나가 되는 삶의 충일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인 본래의 춤을 말합니다. 무(巫)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의 춤, 신기 어린 굿춤이지요. 무(武)는 춤에 무술의 역동성을 더한 춤으로, 이를테면 탈춤, 산대본춤이 태껸과 심무도와 함께 어우러진 춤을 가리킵니다. 무(無)는 텅 빈 지고지순의 상태의 춤입니다. 승무와 바라춤이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대동 4무라는 것이다. 그가 요즘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소리觀 춤’이다. 오장을 움직여서 ‘음, 아, 어, 이, 우’의 긴 소리(詠)를 낸다. 소리를 내다 보면 노래(歌)하게 되고, 몸을 들썩이게 되면서 춤(舞)을 추고, 뛰게(蹈) 된다. 자연의 질서에서 나는 소리와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흥겨운 춤이 하나 되어 몸이 다스려지는 심신훈련법이다. “음양오행의 틀이 바탕이 된 소리觀 춤을 하게 되면 몸은 고루 따스해지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 흐릅니다. 삶의 바탕은 맑고 밝아지고 삶과 마음에서 나오는 춤과 소리가 되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 되는 치유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소리觀 춤은 힐링의 시대에 꼭 맞는 필요한 심신치유법입니다.” 춤은 동작만이 아니라 말, 소리, 글로도 추는 것임을, 춤은 마음으로 추는 것임을, 그리하여 병들고 상처 입은 심신을 치유하는 것임을, 이애주는 소리觀 춤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60년 춤 인생을 맞았지만 그는 아직 규모 있는 기념공연을 갖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그를 대형 공연장에서 본 것이 언제였던가 싶다. 사람들 사이에선 ‘정치적’ 인물처럼 각인되어 있으나, 뛰어다니며 공연장을 구하거나 부탁을 통해 기업의 지원을 받아낼 줄 모르는 성품인 걸 보면 실상 그는 ‘정치적’이지 못하다. 그런 연유로 안타깝게도 이애주의 60년 춤 인생을 기념하는 무대가 언제쯤 열릴지 기약할 수가 없다. “지금 중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들은 작은 공간에 모여서 1년에 한 번씩 학예발표회 수준의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기왕 저마다 애써서 준비하는 무대인 만큼 제대로 된 문화유산으로서의 축제를 만들고, 내실 있는 공연무대를 열 수는 없을까요? 가령 3년에 한 번씩 중요 무형문화재‘답게’ 준비하고, 관객들이 중요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기량과 수준을 즐길 수 있는 무대 말입니다.” 어렵게 예능을 전수하는 보유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에게 제대로 힘을 실어줄 합리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 같다. 큰 눈이 내린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과천의 이애주 춤 전수관으로 가는 길은, 빙판길을 지나 아무도 디디지 않은 수북한 눈길이 이어지는 외진 곳이었다. 전수관이 인적 드문 곳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건 어지간한 방음장치로는 북소리, 악기 소리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이웃들의 민원이 쏟아졌고, 그러다 보니 외진 곳을 찾아 자꾸 옮겨 다녀야 했다. 전통의 맥을 잇는 중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처한 오늘의 현실이다.
31년 만에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다. 지난해 말에 서울대총학생회·서울대민주화교수협의회 등에서 마련한 성대한 고별강연이 있었다. 민족미학연구소를 비롯한 4개 단체는 별도로 ‘한국 춤의 생성론과 이애주의 춤세계’라는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오는 2월 정년퇴임 이후, 그는 어떤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고 있을까? “보다 자유로워졌으니 맥을 잇는 일도 제대로 하고, 내 춤의 역사도 잘 정리해야겠지요. 춤대학과 같은 교육과정을 통해 정통 몸짓 교육을 할 생각이에요. 생을 걸고 춤맥을 잇는 일에 전력을 기울일 겁니다.” 이애주에 따르면 진정한 우리 춤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춤이라고 한다. 그러한 춤정신을 춤학교를 통해 전수하고, 세계인들이 배우러 오도록 구현하고 싶다는 얘기를 할 때 그의 눈이 깊고 맑게 빛났다. 그는 말했다. “생을 걸고 하는 작업이 될 거예요“ 들숨날숨이 드나들고 움직이는 것을 춤의 바탕으로 보는 이애주에게 하루하루는 하나의 의례이고, 굿이다. 돌아보면 선조들의 일상에 의례이자 굿 아닌 것이 있었던가. 노래도 굿이었고, 풍물도 굿이었고, 춤추고 즐기는 축제가 곧 굿이었다.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행사 때면부족 사람들이 모두 날밤을 지새우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지 않던가. 전통은 동시대를 이야기할 때에 의미를 갖는다. 이애주의 춤은 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춤판이라는 굿판을 통해 시대의 화두를 풀어내 왔다.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 시대 속에서 전통을 창조적으로 변혁시켜 온 이애주야말로 이 땅의 큰 무당이다.
글˚이윤수 (문화예술전문 방송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