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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액자가 독립적 조형세계를 이루다
액자가 별도로 독립적 조형형식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족자가 그것이다. 스스로 풍경이 된 창살문양을 풍경요소로 보지 않고 액자로 볼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족자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한국화의 족자에서는 그림 옆에 여백을 두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 별도로 문양을 넣거나 연하게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액자의 틀을 면적을 갖는 여백으로 키운 뒤 그림과 별도의 예술세계를 하나 더 만든 셈이다. 한옥의 풍경작용에서 족자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액자가 일정한 크기와 면적을 가져야 되는 것과 독립적 조형형식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는 족자작용의 출발점이다. 창살문양 자체를 족자의 여백에 넣은 문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풍경요소가 집의 일부인 자경보다는 자연물인 차경이 더 유리하다. 자경에서는 창살문양과 집의 일부 사이에 변별력이 떨어져 족자에 해당되는 부분이 독립적 예술세계로 정의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창살문양이 풍경요소와 한 몸으로 읽히기 쉽다는 의미다. 반면 풍경요소가 자연물이면 창살문양의 인공성은 변별력을 확보하면서 족자가 될 수 있다. 창살문양만으로는 족자가 된다고 해도 약할 수 있다. 문양의 종류가 한 가지로 단순할 뿐 아니라 창호지의 반투명성은 감성적 힘은 강하지만 조형적 독립성은 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 이상의 건물 골격이 가세하면 확실히 족자가 된다. 관가정 사랑채를 보자. 건물 골격은 풍경요소와 완전히 분리되기 때문에 풍경이 아닌 별도의 조형세계로 읽힌다. 이때 건물 골격은 액자가 커지면서 특별한 인공형식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족자에 해당되는 상황이다. 창은 건물 골격의 일부로 편입되어 하나의 큰 족자를 짜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남아 별도의 족자를 형성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족자가 이중이 되는 셈이다. 혹은 풍경요소로 남아 하나의 족자 속에 이중 풍경을 담은 형국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풍경과 조화롭게 어울리다
그렇다면 한옥은 왜 족자작용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졌을까. 족자작용은 건축에서는 당연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실내에서 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깥 경치를 내다보면 족자작용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기초적 조건은 갖춘 셈이다. 이렇게만 하면 모든 집에서 족자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한옥에서의 족자작용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의도적이다. 풍경작용이라는 큰 의도의 일환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렇고 족자에 해당되는 부분을 대부분 노출시켜 바깥 풍경과 어울리게 했기 때문이다.
족자에 해당되는 면적만 확보된다고 족자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이 독립적 조형세계를 이루어야 하며 바깥의 풍경요소와 일정한 어울림을 이루어야 한다. 한옥에서는 이런 의도가 명확히 읽힌다. 실제로 대부분의 한옥 한 채에서도 수많은 지점에서 족자작용이 수없이 일어난다. 특별한 의도가 없었으면 이렇게 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특별한 의도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바깥 풍경과의 조화로운 어울림’을 위해서다. 집과 풍경, 사람과 자연, 안과 밖 등 흔히 이항대립으로 인식되고 있는 관계들 사이에 조화로운 어울림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에서 앞과 같은 족자작용이 일어나게 했다는 뜻이다. 이런 어울림은 족자와 바깥 풍경 사이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 한국화에서도 족자의 역할이 단순히 그림을 물리적 틀로 보조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림과 일정한 심미적, 예술적 어울림을 얻어내는 데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풍경요소가 수목과 꽃일 경우 족자의 인공 구조와 어울릴 수 있는 근거는 동양정신을 대표하는 자연성 혹은 자연 친화성이다. 자연과 인공을 대립 개념이 아닌 조화 개념으로 본 동양정신의 발로다. 이 경우도 족자의 종류에 따라 문과 문 외의 건물 골조,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문일 경우 창살문양을 통해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다. 창살문양은 주역의 궤를 상징하는데 주역의 궤란 것이 본래 자연현상을 인공요소로 법칙화한 것이다. 따라서 창살문양은 강한 규칙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해석하고 자연과 소통하려는 입장을 기본 배경으로 갖는다. 소통은 곧 어울리고 싶어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해석 차원 이외에 시각적으로도 자연풍경과 잘 어울린다. 활짝 열어젖힌 문 한 장, 혹은 반쯤 열어둔 문 위에 창살문양을 걸쳐놓은 모습은 수목과 꽃 같은 자연풍경과 잘 어울린다. 이런 장면은 족자에 수묵 풍경화 한 장 걸어놓은 장면과 동의어다.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도상이다.
문서화(文書畵)를 이루다
족자작용을 통해 문서화를 이룰 수 있다. 문서화는 한국 전통문화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기본 매개체다. ‘문(文)’이란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인간의 생각으로 정리해서 질서로 형식화한 체계다. 족자작용에서는 창살문양, 기둥, 보, 서까래 등 액자의 인공형식이 갖는 정리 기능이 여기에 해당된다. ‘화(畵)’란 감성을 풍요롭게 해주는 서정적, 정서적 감상행위다. 족자작용에 나타난 풍경작용 자체가 여기에 해당된다. ‘서(書)’란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고 소통하는 수단이다. 족자작용에서는 풍경과 하나 되는 쌍방향 교류방식이 여기에 해당된다. 글씨와 같은 도구적, 기능적 형식보다는 주변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려는 심리적 형식에 해당된다. 이처럼 족자작용을 통해 한옥은 문서화에 해당되는 건축적 형식을 갖추게 된다. 문서화 기능이 모두 집에 들어 있게 되는 것이다.
문서화는 기본적으로 한옥에서 수행되는 활동 전반을 담당한 기능적 도구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마음에 부합되고 감성을 어루만져주는 심리적 작용이었다는 점이다. 한옥의 사랑채는 생활공간인 동시에 집무실도 겸했기 때문에 요구되는 기능도 다양했다. 그뿐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심리적 작용도 다양해야 했다. 족자작용이 갖는 문서화의 기능은 이것을 상당 부분 만족시켜주었다. 그 비밀은 다양한 풍경작용을 통해 마음과 감성의 변화에 합당한 다양한 장면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조형 환경이 자신의 마음과 감성 상태와 합치될 때 행복을 느끼며 집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는다. 이때 ‘합치’란 일차적으로는 ‘동일화’를 뜻하지만 확장하면 ‘반대적 중화작용을 포함한 가변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심리상태가 감상적이 될 때 집이 할 수 있는 작용은 두 방향이다. 하나는 같이 동조하며 감상적이 되어 사람의 심리상태를 보강하는 것이다. 향단이 좋은 예다. 워낙 신비롭고 은밀한 공간의 대명사이기도 하려니와 침잠하고 싶을 때 분위기를 맞추기에 제격이다. 이 경우는 문서화 가운데 ‘화’에 해당되는 예술적 감성상태를 즐기면서 난이라도 치고 시조라도 한 수 짓고 싶을 때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을 감상적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문서화 가운데 ‘문’에 해당되는 이성적 활동을 할 때 필요하다. 마음이 지나치게 늘어져 하는 일에 방해가 될 때 기분전환의 반전이 필요한데 집이 이것을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한옥의 족자작용은 집을 통해 심리적 위안과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족자작용은 분명 집의 분위기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창 조작에 따라 분위기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한 지점에서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장면을 본 것인데 창만 다르게 조작함으로써 다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예에 해당된다. 문짝의 위치와 문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좌우 양쪽에서 같은 짝의 문을 닫아서 같은 문양을 보이게 할 경우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때 문이 열리는 정도 역시 좌우가 같으면 가장 단정하고 반듯한 분위기를 준다. 열리는 정도가 다르면 좀 흐트러진 분위기가 된다. 좌우가 다른 문일 경우, 즉 다른 문양이 보일 경우 분위기는 분명히 더 흐트러진다. 가장 흐트러진 경우는 좌우가 다른 창이면서 열린 정도도 다른 경우이다.
이처럼 한옥은 집 전체가 한 폭의 큰 그림이자 수많은 작은 그림들로 이루어진 미술관이었다. 그 그림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다. 사람은 골조를 세우고 문을 달고 창을 냈을 뿐이다. 창호지를 바르고 문살을 쳤을 뿐이다. 관건은 마음이다. 바깥 자연과 어울리고 싶었고 그 방향이 족자작용으로 구현된 것이다. 바깥 자연은 하루 중 시각 따라, 일 년 중에는 계절 따라 또 철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변화하고 순환한다. 이 모든 것이 족자 속 그림이 된다. 마치 화가 여럿을 집 안에 두고 수시로 그림을 그려 바꿔 단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던가.
글˚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