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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
창과 문은 액자만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풍경요소가 되기도 한다. 창이 특히 그렇다. 미닫이창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문짝이 창틀 안쪽으로 밀고 들어와 풍경을 가릴 경우 이 부분을 액자로 볼지 풍경요소로 볼지의 문제가 생긴다. 열쇠는 창호지가 쥐고 있다. 창호지가 빛을 받아 반투명 막이 되고 창살문양이 드러나면 창은 액자로만 머물지 못하고 그 자체가 풍경요소가 된다. 마치 두 장의 풍경을 겹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창이 밀고 들어오는 정도와 방향에 따라 풍경작용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그 정도가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양쪽으로 분산되는 것보다 한쪽으로 몰아주는 편이 낫다. 한쪽은 닫아놓고 다른 한쪽만 여는 경우다. 이때는 창 스스로 풍경이 되는 장면이 하나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바깥 풍경요소와 일대일 대응이 일어난다. 바깥 풍경요소가 자연물일 때에는 언뜻 보기에 인공요소인 창과 대립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한옥 특유의 어울림이 그만큼 강하게 나타난다.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큰 장면 두 개가 어울리기 때문이다.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는 창이 풍경에 틀 짜기를 가하고 풍경을 재단하는 일을 하다 풍경에 취해 스스로 풍경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창 스스로가 하나의 풍경요소, 즉 인공적 풍경요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창살문양과 창호지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창살문양은 창을 풍경요소로 둔갑시키는 일차적 역할을 한다. 문양 자체가 강한 조형형식을 띠면서 액자 이상의 기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액자의 기능은 틀 짜기를 통한 풍경장면의 정리가 기본인데 이것을 넘어서 풍경요소의 기능인 조형 형식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창호지 - 창살문양에 감성을 실어 감상 대상으로 만들다
창살문양이 풍경요소가 되기 위해서는 정리 기능 같은 형식미를 발동하는 주체에서 벗어나 감상의 대상으로 변모해야 한다. 감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창 혹은 창살문양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장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감흥이 일어나는 감성작용이 실려야 되는데 이것을 해주는 것이 창호지다. 창호지는 중성적 건축형식인 창살문양을 마음의 감성작용에 대응시켜 심미 요소로 둔갑시킨다. 인공 형식미에 온기를 실어 생활 속 일상가치를 상징하게 만든다. 창호지는 반투명이기 때문에 빛을 받으면 창살문양의 인공 조형성을 잘 드러낸다. 불투명하면 벽의 연장으로 읽힐 뿐 스스로 풍경요소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풍경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유리처럼 투명하면 바깥 풍경요소 위에 셀로판지를 붙여놓은 것처럼 보일 뿐 스스로 조형 형식을 갖추지 못한다. 창살문양은 풍경요소가 되지 못하고 바깥 풍경요소 위에 묻은 얼룩처럼 느껴진다. 풍경이 되기에는 과하다. 반투명인 상태에서 창살문양은 온전히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다.
창살문양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상태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바깥의 바깥 풍경요소 위에 겹쳐지지 않고 병렬을 이룸으로써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다. 빛의 종류와 세기 등에 따라 창과 문양의 분위기나 모습이 변하는 것도 창호지의 활약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이런 다양성이 바로 창살문양에 감성작용을 실어내주는 기능을 한다. 창 스스로 풍경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창 스스로 풍경이 된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증명하는 증거다. 거꾸로 말하면 창이 스스로 풍경이 되었을 때 줄 수 있는 구체적 선물 가운데 하나다.
하루 시간의 흐름, 날씨, 계절 등이 기준이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보자. 창살문양의 풍경작용은 먼동의 청회색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인공 조형형식을 드러내면서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린다. 창살문양이 갖는 질서정리의 상징성을 깨우쳐 인간 활동의 의무와 의미를 알린다. 어스름 속에서 창살문양의 인공 조형형식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색조가 하필 청회색이다. 밤의 색 회색에서 빛의 색 청색으로의 전이를 통해 박동을 걸어 생명을 깨운다. 창은 스스로 풍경이 되면서 생명작용의 잉태를 선물한다. 날이 맑아 대낮에 직사광선을 받으면 창호지는 뽀얀 우윳빛으로 밝게 빛난다. 창과 문양은 자신에 차 풍경요소가 된다. 창의 인공성은 확신을 심어준다. 활기차게 하루 일과를 진행할 수 있다. 창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햇빛을 선사하는데 그 방식이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적이고 간접적이다. ‘뽀얀 우윳빛’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다. 이 말은 햇빛이 인공 조형형식을 통해 인공화되었다는 의미로서 창 스스로 풍경이 되게 하는 일차적 조건이기도 하다.
‘뽀얀 우윳빛’을 볼 때 일어나는 감성작용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창호지를 볼 때면 어릴 적 안기던 어머니 젖무덤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어머니의 속살 색이다. 이런 속살 색을 만들어내는 맑은 대낮의 햇빛은 일 년 중, 하루 중 생명작용이 가장 활발할 때의 자연 상태다. 생명작용의 절정을 상징한다. 어머니의 젖무덤과 속살도 젖먹이를 기른다는 점에서 이에 뒤지지 않는 생명작용의 상징성을 갖는다. 모태와 모성의 상징성이다. 창호지란 결국 생명작용의 시작이자 끝인 햇빛을 모태와 모성과 일치시켜 상징해내는 작용을 한다. 창은 스스로 풍경이 되면서 어머니 속살에 대한 상징적 기억을 선물로 준다. 하루 일과가 끝날 때쯤 창살문양은 석양의 붉은 색으로 변한다. 휴식을 준비하는 마감과 차분함을 상징한다. 흐린 날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창호지에 드리우는 중후한 회색은 마음을 침착하게 한곳에 모을 수 있게 해준다. 창의 풍경작용은 이런 다양한 것들을 해준다. 다양성은 창호지가 반투명 재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며 창이 스스로 풍경이 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다.

‘풍경 속 풍경’과 ‘액자 속 액자’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를 이중 풍경작용, 즉 ‘풍경 속 풍경’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자경중첩보다는 차경중첩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바깥 풍경요소가 자연물이면서 창이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먼저 창틀 속에 나무나 꽃이 한 그루 자리 잡아 한 폭의 풍경화가 만들어진다. 이것과 별도로 창살문양이 또 하나의 풍경을 형성한다. 바깥 풍경화 하나에 창살문양의 풍경화가 하나 더 생겨 중첩되는 상황이다. 창살문양의 풍경 속에 바깥 풍경화가 들어 있는 형국으로 읽힌다. 풍경 속에 또 하나의 풍경이 들어 있는 이중 풍경작용, 즉 ‘풍경 속 풍경’이다.
창이 두 겹 겹치는 중첩은 ‘풍경 속 풍경’을 만들기에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 방 밖에서 방 속을 관통해 반대편 창 너머 풍경을 보는 경우와 대청 뒷마당에서 뒤창을 통해 대청을 가로질러 앞마당을 보는 경우다. 액자가 두 겹이 되기 때문에 풍경 속에 풍경이 담기는 중첩성이 배가된다. 세 겹 중첩, 심지어 네 겹 중첩으로까지 발전하는 수도 있다. ‘바깥 풍경-바깥 창-방-내 쪽 창’으로 구성요소의 켜와 겹 수가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창이 풍경요소가 되지 못하고 액자에 머물면 ‘풍경 속 풍경’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액자 속 액자’가 된다. 한옥을 대표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인데 겹 수가 많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가 쉽다. 햇빛을 받는 바깥 창이 너무 멀리 있어 창호지 효과가 크게 약화되기 때문이다.
‘액자 속 액자’에서 겹 수가 많아지면 중첩을 넘어 콜라주와 바로크로 넘어간다. 중첩이 지나쳐 분산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경우가 분기점이다. 한옥의 구조로 볼 때 이런 현상이 잘 발생하는 지점이 따로 있다. 공간 켜가 여러 개 겹쳐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창을 통해 본 바깥 풍경에 문이 있어 그 문이 액자 겹 수를 하나 더 늘리는 경우가 좋은 예다. 대청 뒷마당에서 뒤창을 통해 앞을 볼 때 안대문이나 솟을대문이 있고 그 문 속에 풍경이 하나 더 들어 있는 경우가 좋은 예다. 안채의 ‘ㅁ’자형 구도에서 부엌이 같은 축 위에 있을 때 한쪽 부엌 밖에서 문을 통해 반대편 부엌을 보면 네 개의 문이 겹쳐 보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