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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연암 박지원의 글 중에 ‘옥새론’이 있다. 춘추시대의 화씨옥이 진시황에 의해 옥새로 제작된 후, 중국 역대 왕조가 이 옥새로 말미암아 겪어야 했던온갖 우여곡절이 주요 내용이다. 그런 면에서 연암의 ‘옥새론’은 옥새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연암은 결론에서 옥새를 보물이 아니라 흉물이라고 주장한다. 옥새의 역사로 볼 때, 나라가 망하는 날 옥새를 목에 걸고 항복하기도 하고 선위하는 즈음에 옥새를 받들어 바치기에 바빴다는 이유에서다. 연암은 아예 옥새를 부수어 없애버리고, 왕이 즉위할 때 옥새를 받는 대신 “유정유일윤집궐중(惟精惟一 允執厥中)”이라는 여덟 글자를 외치게 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기까지 한다. “유정유일 윤집궐중”의 여덟 글자는 진시황의 옥새에 새겨졌다고 하는 “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于天 旣壽永昌)”의 여덟 글자를 대체하려는 것이다. 연암이 그렇게 하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수명우천 기수영창”이란 말의 뜻도 좋지 않고 또 진시황이 옥새를 만든 저의 역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진시황이 전국시대를 통일했을 때, 가장 귀중하게 여길 만한 보물은 당연히 구정(九鼎)이었다. 하, 은, 주 이래로 춘추전국시대까지 제왕의 정통성을 상징하던 것이 바로 구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구정을 찾을 수 없었다.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구정이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진시황은 구정을 대체할 다른 것을 물색하다가 화씨옥을 이용해 새(璽)를 제작하고 이를 구정 대용으로 삼았다. 화씨옥은 하늘이 내린 이른바 ‘완벽(完璧)’이었기때 문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이전부터 왕의 인장은 물론 신하의 인장도 새라고 불렸다. 뿐만 아니라 왕은 물론 신하도 옥으로 인장을 만들 수 있었고 옥 인장은 옥새로 불렸다. 이런 상황에서 진시황은 화씨옥으로 만든 옥새로써 구정을 대체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옥새는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진시황 이래로 옥새는 황제의 인장을 상징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정통성을 상징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진시황의 옥새는 신하들의 옥새에 관한 기득권을 탈취함으로써 절대적인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진시황은 승상 이사를 시켜 옥새에 “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于天 旣壽永昌)”이라고 새기게 하였다. 그 뜻은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오래 살고 영원토록 번창하리라”는 의미였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 옥새를 통해 진나라가 영원무궁하기를 믿었고 또 기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시황의 옥새는 중국 역대의 왕조에 전해졌기에 일명 ‘전국새(傳國璽)’라고도 하였으며, 당나라 때부터는 ‘새’의 발음이 죽을 ‘사’와 비슷하다고 하여 보(寶)라는 용어가 사용되면서 ‘새’와 ‘보’가 혼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면 진시황의 옥새는 만들어진 과정이나 만든 저의 그리고 역사적 기능이 꼭 좋은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연암이 옥새 대신 “유정유일 윤집궐중”의 여덟 글자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인데, 이 여덟 글자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선위할 때 전수한 제왕학의 비결로서 “사람의 마음을 정밀하게 하고, 하늘의 도리를 전일하게 하여, 그 중심을 잡는다”는 뜻이다.
연암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옥새는 전근대 내내 중국의 황제는 물론 동아시아 각국의 왕들에게도 필수품이었다. 옥새에는 부정적인 기능 이상으로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의 황제는 옥새를 이용해 자신이 천명을 받은 존재 즉 천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것을 근거로 중국의 황제는 동아시아 각국의 왕들을 책봉하고 책봉된 왕들과의 외교관계만 인정했다. 동아시아 각국의 왕들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또 국내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중국 천자의 책봉을 받았다. 이렇게 형성된 책봉관계를 통해 동아시의 국제관계는 물론 각국의 정치가 안정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였다. 동아시아의 책봉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바로 옥새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중국 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였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될 때는 임명장인 고명(誥命)과 함께 책봉 인장을 받았다. 책봉 인장은 조선 국왕의 정통성과 왕권을 상징하였기에 옥새라고 불렸으며, 또한 왕의 인장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인장이라는 의미에서 대보(大寶)라고도 불렸다. 책봉 인장의 인문(印文)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한문이었는데, ‘조선국왕’이 책봉 명칭이었다. 조선 시대 후계 왕은 즉위할 때, 선왕의 찬궁(欑宮) 앞에서 유언장과 함께 옥새를 받음으로써 후계왕으로 공인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에 외교문서를 보낼 때, 이 옥새가 사용되었으며, 주요 통치의례에서도 이 옥새가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옥새 사용은 태조 이성계의 건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뒤이어 왕이 되었을 때에는 공식적으로 감록국사(監錄國事)의 자격이었다. 또한 신왕조의 국명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공식적인 국가 명칭은 여전히 고려였다. 이에 따라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부터 조선이라는 국호가 확정된 1393년 2월 15일까지 태조 이성계의 신왕조는 여전히 고려였다.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자신을 권서국사로 자칭하였으며 당시의 외교문서에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 새겨진 옥새가 찍혔다. 이 옥새는 공민왕 때 명나라에서 받은 것으로서 사방 3촌 크기에 거북이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황금 인장이었다. 하지만 이 옥새는 태조 2년(1393) 3월 9일자로 명나라에 반환되었다. 이후 태종 1년(1401)에 ‘조선국왕지인’이라 새겨진 옥새를 받았는데, 이 옥새는 병자호란 전까지 조선 국왕의 인장을 대표하였다. 인조는 항복 직후 항복조건에 따라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는데, 그 증거로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를 청나라에 바쳤다. 청나라는 인조 15년(1637) 겨울에 사신을 파견해 새로 만든 옥새를 전달했다. 이 옥새에는 명나라에서 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국왕지인’이라는 인문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한문과 함께 여진 문자가 새겨졌다는 점이 달랐다.
1897년(광무 1)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황제국의 주권자는 황제 였으므로 기왕의 ‘국왕’이라는 용어는 더 이상 최고 권력자를 지칭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기왕의 옥새를 비롯한 국왕의 인장들은 황제의 인장으로 바뀌어야 했다. 『대례의궤(大禮儀軌)』에 의하면 고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命之寶) 등이 제작되었다. 이 중에서 대한국새가 고종의 옥새였다. 전통적으로 옥새를 비롯한 인장은 인신(印信)이라고도 불렸는데, 믿음을 담보했기에 그렇게 불렸다. 제왕과 옥새의 관계에서도 믿음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비록 제왕이 천명을 받은 존재라고 해도 하늘의 믿음을 저버리면 천명이 떠나고 옥새 역시 떠난다고 믿었다. 제왕이 천명과 옥새가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명령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은 곧 좋은 정치를 통해 이 땅에 태평성대를 구현하라는 하늘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유교정치이론에서 강조해 마지않는 치국평천하 바로 그것이었다.
글˚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