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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시대의 ‘거울’, 옛이야기
- 샤를 페로본, 그림 형제본 그리고 옛이야기 그림책
글. 김순녀(서울디지털대학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원)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민담은 16세기 르네상스 시기 이후로 인쇄가 발전하면서 ‘다시 쓰기’로 발전했다. 교훈이 강한 교육용 ‘전래동화’로 출간되어 오늘날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산문으로 쓴 프랑스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의 옛이야기와 독일 그림 형제(Jacob Grimm, 1785~1863 & Wilhelm Grimm, 1786~1859)의 메르헨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전래동화는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한국어로 번안·번역되어 우리나라 독자가 읽기 시작한 지 백 년이 넘었다.
1922년 『사랑의 선물』로 <산드룡의 유리구두>(신데렐라)와 <잠자는 왕녀>(장미 공주) 이야기를 소개한 방정환(1899~1931)은 서문에 학대받고 짓밟히는 불쌍한 어린이를 위해 이야기를 짰다고 했다. 그러면 오늘날 독자는 어떻게 옛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그림 형제의 ‘메르헨’을 옮긴 김경연은 『그림 형제 민담집-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2012)에서 ‘민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파우트스』 등을 옮긴 전영애는 『그림 동화.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2023)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 ‘동화’라는 용어는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방정환이 ‘아동에게 들려주는 설화’라고 정의하며 “<해와 달>, <흥부 놀부>, <콩쥐 팟쥐>” 같은 옛이야기가 동화라고 했다. 유럽의 전래동화는 일본을 거쳐 ‘세계명작동화’라고 이름표도 붙여져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과연 세계의 ‘명작’ 동화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헨젤과 그레텔( Hansel und Gretel )> 삽화, 1909년 |아서 래컴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
샤를 페로본(本): 기독교적인 윤색과 길들이기
파리에서 문학과 법을 공부한 샤를 페로는 루이 14세가 프랑스를 통치할 당시 재무부와 예술문화정치부 장관이었던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 1619~1683)의 오른팔이었다. 『루이 14세의 세기』(1687)를 운문으로 쓴 페로는 당시 신구논쟁1의 주역이었는데 라틴어 운문으로 신화를 다시 쓰는 고전파를 반박하며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발전시킨 프랑스 궁정 문학아카데미 회원이었다. 절대 권력을 위해 일하던 페로가 비서직을 잃고 일흔이 다 되어 산문으로 쓴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빨간 모자>, <푸른 수염>, <장화 신은 고양이>, <요정들>, <상드 리용 또는 작은 유리 구두>, <엄지 소년> 등 여덟 편의 이야기를 묶어 『나의 ‘거위’ 어멈이 들려주는 옛이야기』(1697)를 아들의 이름으로 펴낸다.
1 신구문학논쟁(querelle des Anciens et des Modernes): 17세기 말~18세기 초, 프랑스를 뜨겁게 달군 문학 논쟁을 말한다.

<즐로티(Zloty)>, Swiss Edition, 2009년 | 토미 웅게러
출처: Amazon
페로는 민담이 가진 가치와 희망보다는 ‘길들이기’와 기독교적인 윤색이 강한 교훈적인 이야기로 다시 쓴다. 페로의 옛이야기는 산문으로 된 이야기와 마지막에 운문으로 된 교훈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두드러지는 가시적인 교훈이 오늘날 우리 세대에게 적합한지 의문을 남긴다. <빨간 모자>의 경우 주인공이 늑대에게 잡아먹혀 비극적으로 끝난다. 그러한 탓에 그림 형제는 사냥꾼이 와서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빨간 모자를 살려내는 이야기로 다시 쓴다. 아니 그러한 이야기를 이야기꾼에게서 들었다. 본래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민담은 온갖 시련을 이야기하는 서사라도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페로의 결말을 전복하는 <빨간 모자> 이야기가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쓰이는 이유도 비극적인 결말 때문이라고 본다. 1997년에 그림책 작가로서 크리스티앙 안데르센상을 받은 토미 웅게러(Tomi Ungerer, 1931~2019)는 『즐로티』 (2009)에서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빨간 모자>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재해석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할머니 집에 가다가 숲속에서 늑대를 치는 사고를 내고 할머니 집에 데려가 할머니와 늑대를 동시에 간호하는 강한 어린이상을 제시한다.

(좌) <빨간 모자(Le Petit Chaperon rouge)> 삽화, 1862년 | 귀스타브 도레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
(우) <신데렐라(Cinderella)> 삽화, 1862년 | 귀스타브 도레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
페로는 프랑스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담이나 지암바티스타 바실레(Giambattista Basile, 1566~1632)가 쓴 『펜타메로네』(1634~1636)의 영향을 받아 옛이야기를 다시 썼다. 페로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야기는 『펜타메로네』에 나오는 <해와 달과 탈리아>를 다시 쓴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이탈리아 판본에서 보이는 신화적인 흔적이 대부분 삭제된다. 나아가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으로 지속적으로 고쳐 쓴 그림 형제 판본에서는 바실레 본과 페로 본에서 남아 있는 잔인한 결혼 후일담이 모두 삭제된다.
페로의 옛이야기는 초판본부터 삽화와 함께 출간되었는데 샤를 페로의 옛이야기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 계기는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1832~1883)가 그린 일러스트레이션 양장본 덕분이다. 화가이자 조각가였던 도레는 『페로의 옛이야기』뿐만 아니라 『성서』, 프랑소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라퐁텐의 『우화』,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 문학 작품을 그림으로 재해석해 20세기의 수많은 작가, 예술가, 영화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페로가 베르사유 궁전의 추억을 묘사한 <상드리용 또는 작은 유리 구두> 이야기에서 ‘재(cendre)’라 는 뜻에서 온 상드리용’은 우리나라의 <콩쥐 팥쥐>와 같은 이야기 유형으로 영어본 <신데렐라> 또는 그림 형제의 『재투성이 소녀』 이야기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그림 형제의 판본보다 페로 본이 더 많이 읽히는 이유는 1922년 방정환이 번안하고 출간한 『사랑의 선물』 덕분이다. 그가 번안한 <산드룡의 유리구두>를 자세히 읽어 보면 시작과 끝부분에서 그림 형제의 <재투성이> 이미지를 불러오지만 벌을 받는 잔인한 장면은 가져오지 않고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페로 본을 선택해 여주인공을 ‘울보’로 강조한다. 그러나 페로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신데렐라는 착하고 적극적이며 영리한 여성이다.
그림 형제본(本): ‘순수’ 민족 이데올로기와 가정의 동화
그림 형제의 옛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 온 이야기를 채록한 기록이다. 그림 형제가 쓴 서문을 읽어 보면 “글로 된 문학이 미미한 민족에게서는 전반적으로 구전 전승이 문자의 대체물이 되어 보다 강하고 원형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며 독일의 다른 지역보다 니더작센 지방에서 설화가 더 많이 보존된 듯 보인다고 한다.
이 말은 채집해 기록된 문학이 이야기의 변형과 왜곡이 더 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림 형제는 지역에서 채록한 이야기나 어느 농부의 아내 등 수많은 여성에게서 들은 신중하고 확실하고 생생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로 꾸미면서 “아이들이 읽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염려를 고려”하며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고쳐 썼고, 오늘날 독자 대부분은 그림 형제의 1857년 판본을 읽는다.
그림 형제는 1819년 판본 서문에서 고백한다.
보다 단순한 것, 보다 순수한 것, 그러면서 그 안에서 보다 완성된 것을 그릇된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완하여 결합하는 데 어긋나는 것들을 잘라 내고 하나의 이야기가 되게 했다.
<백설공주> 이야기를 예로 들면 그림 형제가 1810년에 자필 원고로 쓴 이후로 1857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판본까지 여러 번 고쳐 썼다. 자필 원고와 1812년에 출간된 첫 번째 판본에서는 계모가 아닌 친엄마가 등장하지만 1819년 판본부터 사악한 계모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림 형제가 다시 쓴 전래동화의 문제는 백설공주처럼 수동형인 여성이 주인공이고 선의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여성은 순종하고 희생하며 순결해야 아름답다고 생각하던 가부장적인 의식이 팽배한 19세기 독일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재투성이>나 <헨젤과 그레텔>에서처럼 좀 더 적극적인 여성이나 영리함으로 오빠 헨젤을 구해 마녀의 집을 탈출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있다. 남성상은 아름다운 여성한테 사랑에 빠진 왕자님이거나 가난한 바보이거나 악마의 도움으로 부와 명예를 얻는 군인들이다. 그림 형제는 서문에서 ‘순수함’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사용한다. “시와 신화의 역사 [...] 안에 살아 있는 시 자체가 작용하고, [...] 교육서로 쓰이면 하는” 바람 속에서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속에서 ‘순수함’을 찾고 있다고 한다. “올곧은 이야기의 진실 가운데 있는 순수함”을 찾고자 “1819년 판에서 아이들의 연령에 맞지 않는 표현은 뭐든 세심하게 지웠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전 유럽으로 확산될 즈음에 언어학자이자 인문학자인 그림 형제는 민족의 정신을 찾기 위해 독일 전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채록하고 기록했다.

<백설공주(Snow White)> 삽화, 1909년 | 아서 래컴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
그림 형제가 수집한 메르헨이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때는 1913년 최남선(1890~1957)이 아동을 교육하고 계몽하기 위해 만든 어린이 신문 《붉은 저고리》와 《아이들 보이》라는 청소년 잡지를 통해서이다. 1899년에 태어난 방정환은 어릴 적 이 매체를 접한 세대였다. 이야기꾼인 방정환은 1922년 『사랑의 선물』을 통해 그림 형제의 <장미 공주>와 더불어 열 편의 이야기를 번안하고 출간했다. 그리고 이듬해 『어린이』를 창간하고 5월호부터 7월호까지 3회에 걸쳐 ‘몽중인(夢中人)’이라는 필명으로 <자미잇는 이약이 백설공주> 번안문을 실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백 년 전부터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가 읽히기 시작했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향이 크다. 1937년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제작된 이래로 전 세계의 어린이들은 그림 형제의 판본을 알기 전에 애니메이션으로 이야기를 먼저 접하게 되며 이야기의 굴절이 생긴다.

방정환이 제작한 『어린이』 잡지 중 <백설공주>, 1923년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시대의 거울, 옛이야기
인쇄 미술이 거듭 발전한 오늘날은 이야기꾼이 사라진 자리를 그림책 작가가 대신한다. 그림책 작가는 옛이야기를 그림으로 재해석하고, 독자는 더욱 다양한 옛이야기 그림책을 찾아볼 수 있다.
필자(필명 김시아)가 번역한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아듀, 백설공주』(2024)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고 분류하기보다 어른이 보는 예술그림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를 읽고 잔인한 결말에 의문을 제시한다. 계모 왕비의 시선을 채택해 1인칭 화자로 바꾸어 글을 쓴다. 번역자로서 제일 힘들었던 지점은 감정이입이었다. 어릴 적,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3인칭 화자로 쓰인 『백설공주』 이야기를 읽을 때는 주인공인 백설공주에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그러나 계모를 1인칭으로 하는 ‘나’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의 복잡한 내면을 바라보며 어린 백설공주보다 어른인 계모 왕비에게 감정이입이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악을 편드는 것은 아니다. 한 편의 연극을 보듯 등장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더 자세히 읽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아가 왕자와 공주의 결혼식 장면에서, 재가 된 왕비의 모습과 모든 걸 구경하며 광경을 목격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선과 악의 경계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는 계모 왕비의 질문에 대답하는 거울의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거울이 백설공주도 예쁘고 계모 왕비도 아름답다고 칭찬했다면 왕비는 과연 질투심에 사로잡혀 어린 공주를 죽이려 했을까? 그림 형제 판본에서 거울은 그 당시 시대를 반영하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 시대의 가부장적인 목소리. 지금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거울의 목소리는 당시의 여성관을 그대로 보여 준다. 국가 간의 국경과 민족의 경계선이 명확했던 과거 그림 형제 동화는 권선징악의 구도 속에서 수동적인 여성관에 가치 부여를 하며 알게 모르게 편견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

『아듀, 백설공주』 본문 삽화, 한솔수북, 2024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는 백설공주를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 인물의 신체도 과장되고 색과 색의 경계는 흐릿하며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로테스크 미학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 독자에게 낯선 그로테스크 미학을 이해하면 작가가 그린 작품에 대해 이해하기 쉬워진다. 역사학자 에카르트 산데르(Eckhard Sander)에 의하면, 『백설공주: 옛이야기일까, 진짜 이야기일까?(Schneewittchen: Märcheno-derWahrheit?)』(1994)에서 백설공주 이야기는 16세기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생겨난 이야기를 듣고 그림 형제가 썼다고 한다. 17세기 독일에서는 수많은 마녀사냥이 있었다. 이 이야기가 ‘마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꾸며진 일이라면 독자는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다시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이상 옛이야기의 숲을 헤매는 필자는 짧은 지면 속에서 필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즉 샤를 페로의 옛이야기와 그림 형제의 메르헨, 방정환의 번안본 그리고 필자가 번역한 그림책 『아듀, 백설공주』를 위주로 살펴보았다. 옛이야기 연구자들은 끝없는 ‘옛이야기 숲’에서 헤매지만, 각자 좋아하는 이야기는 조금씩 다르다. 필자는 어릴 적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새어머니와 살아서 그런지 유독 ‘계모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다행히 새어머니는 ‘사악한 계모’도 아니고 필자는 계모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옛이야기는 인간의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옛이야기는 시대에 알맞게 다시 쓰이고 신중하고 지혜롭게 생각할 수 있는 비판적인 태도와 함께 전승되어야 한다. 인쇄되고 고정된 판본은 독자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을 조장하는 교육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사고의 유연성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다양한 판본과 다양한 옛이야기 그림책을 비교하며 읽어 보고 유사함과 차이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1세기는 ‘순수함’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으로 들릴 정도로 복잡하고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다. 나와 타자(외부인, 외국인)를 선과 악으로 나누던 이분법적인 벽과 국경은 이미 무너졌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의 섬에 갇힌 대한민국의 독자들이라면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누가 공부를 제일 잘하니? 누가 제일 잘사니?”라는 질문 말고 각자가 자신의 삶과 행복에 대한 다른 질문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