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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왜 해와 달은
오누이인가?
글. 조현설(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류는 상상한다. 인류는 사물에서 사물 이상을 상상했다. 그래서 나무와 돌이 신이 되고, 하늘의 해·달·별도 신으로 여겼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대는 나의 태양’과 같은 은유를 상상했고, 이를 시와 노래, 그림과 춤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상상하는 동물이다. 그 상상의 중심에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있다. 눈부셔 쳐다볼 수 없는 해와 매일 모양이 달라지는 달을 보며, 텔레비전도 유튜브도 없던 휴식의 시간에 인류는 무슨 상상을 했을까?

일러스트: 심은경
해와 달에 대한 신화의 상상
해와 달은 어떻게 생겼지? 누가 만들었지? 달은 왜 보름달이 되었다가 점점 이지러지다가 때로는 사라지는 것일까? 왜 불현듯 일식이 나타나고, 때로는 월식이 생기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해결하려고 인류는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를 꾸며 냈다. 이야기의 다른 편에서는 해와 달의 주기적인 패턴을 살펴 일력과 월력을 만들기도 했다. 농사를 짓고, 항해를 시작하면서 또는 제사를 지내면서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화적 상상과 과학적 상상은 상상력의 쌍둥이다. 인류가 가진 상상력의 바탕은 먼저 자신의 몸이고, 그 다음은 몸들의 관계, 곧 가족에서 출발하는 사회적 관계들이다. 해와 달이 창세신(創世神)의 두 눈에서 비롯되었다는 상상력이 그런 것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빚어낸 상상력은 여기가 시발점이다. 해와 달은 창세신의 눈이 변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상상 옆에 해와 달은 오누이 관계라는 상상이 있다. 옛사람들은 왜 그런 상상을 펼쳤을까? 베링해협에 사는 이누이트족은 해와 달의 관계에 대해 이런 신화적 상상을 했다.
옛날에 어떤 부부가 바닷가 외딴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아이가 둘 있었는데 오누이였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났고, 오빠는 여동생을 사랑하게 된다. 오빠가 줄기차게 누이를 쫓아다녔기 때문에 누이는 하늘로 피신해 달이 된다. 그 뒤로도 오빠는 해의 형상으로 누이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때때로 오빠가 누이를 붙잡아 껴안는 데 성공했고, 그렇게 하여 월식을 일으켰다. 아이들이 떠나 버린 후 아버지의 마음에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생겨났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으로 나와 질병과 죽음을 불러일으켰고, 질병으로 죽은 희생자들을 먹이로 삼았다. 그러나 탐식 욕구는 만족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커져 갔고, 마침내는 건강한 사람들마저 잡아먹기 시작했다.

에스키모 주거지(Habitations des esquimaux(Sennecke), 1928년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
해와 달은 오누이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누이를 사랑해 줄기차게 따라다니는 오빠, 그리고 기를 쓰고 도망치는 누이! 둘이 사랑하면 근친상간이고, 억지로 껴안으면 성폭력이다. 인류사의 터부와 작금의 핫 이슈(hot issue)가 이누이트 일월기원신화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신화는 폭력적 근친상간을 긍정하지 않는다. 월식이 증거다. 월식은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현상이지만 월식을 태양이 달을 먹는 것이라 생각한 이누이트 사람들은 태양인 오빠가 달인 누이를 덮치는 것으로 상상했다. 이 ‘부정’으로 인해 질병과 죽음이 초래되었다고 신화는 이야기한다. 월식의 밤에 이런 이야기를 이누이트 마을에서 구연했다고 상상해 보자. 신화를 듣는 소년 소녀들은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근친혼을 상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해와 달에 대한 민담의 상상
그런데 민담으로 구전되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는 근친상간 이야기가 없다. 일제강점기에 조사 된 두 가지 유형의 민담이 있는데 하나는 영어로, 다른 하나는 일본어로 기록된 자료다. 먼저 손진태의 일본어 자료를 보자.
옛날 하느님은 오빠는 태양으로, 누이는 달로 만들었다. 어느 날 달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태양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오빠는 양보하지 않았다. 심하게 다투다가 오빠가 담뱃대로 누이의 눈을 찌른다. 오빠는 눈이 찔린 누이를 불쌍히 여겨 자리를 양보한다. 결국 누이가 해가 되고 오빠가 달이 되었다. 그때 찔렸던 눈의 상처가 태양의 흑점이 되었다고도 한다.

『조선민담집( 朝鮮民譚集)』, 1930 년 | 손진태
출처: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이 민담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근친상간 화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문은 남아 있다. ‘누이의 부끄러움’이 그것이다. 누이의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는 소녀의 수줍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구술의 현장에서는, 혹은 동화로 구연될 때는 ‘소녀의 수줍음’이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민담의 신화적 연원을 생각한다면 부끄러움에는 성적 맥락이 없지 않다. 오누이가 다툴 수는 있겠지만 다투다가 눈을 찌르는 오누이를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흑점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적 결말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오누이는 이누이트의 오누이와 다른 오누이가 아니다.

해와 달 이야기 우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일반적으로 민담은 오랜 세월 구전되는 동안 다른 민담과 섞이면서 변형된다. 손진태가 보고한 또 다른 <일월 전설>에는 범이 섞여 들어온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유형의 이야기다. 범은 먼저, 오누이를 남겨 두고 이웃 마을에 품 팔러 갔다 오는 홀어미 앞에 나타난다.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묵을 얻어 고개를 넘는 중인데 범이 나타나 묵을 요구한다. 묵은 떡으로 변형되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떡이 더 일반화되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와 같은 투식구(套式句, 굳어진 어구)로 빚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범의 요구가 묵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이 민담의 묘미가 있다. 묵을 다 먹은 범은 옷을 벗어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치마를 벗어 주고, 이어서 저고리에 바지, 속적삼에 속속곳까지 다 벗어 주고 맨몸이 된다. <일월 전설>은, 그래서 어머니가 나뭇잎을 따서 음부를 가리고 갔지만 범은 다시 나와 팔과 다리를 요구하고, 마침내 몸뚱이까지 요구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대개 옷 벗는 대목은 빼고, 대신 팔다리까지 먹힌 어머니가 몸뚱아리만 남은 채로 데굴데굴 굴러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무서워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더 듣고 싶어 한다.
대단히 자극적인 범의 정체를 두고 갖가지 해석이 베풀어졌다. 산길을 넘어오는 여성 앞에 나타난 범은 생물학적 범이 아니다. 묵이나 떡을 먹는 범, 여성의 속적삼까지 요구하는 범이 동물원에서 만날 수 있는 범일 리 없다. 범은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적 상태의 상징물일 수 있다. 범은 오누이를 홀로 키우는 가난한 어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제적 고난일 수도 있고, 홀어미를 노리는 폭력적 남성상일 수도 있고, 근친상간의 맥락에서 보면 오빠의 변형물 또는 다른 근친혼적 관계의 공포를 상징하는 사물일 수 있다. 달리 보면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오누이를 공격하는 범은 모성의 부정적 양상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연구자들의 해석에 따라 또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수용자의 심리에 따라 범은 다른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
달과 해의 교체에 대한 상상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는 또 하나의 문제적 장면이 있다. 그것은 이누이트 일월기원신화에는 보이지 않는 ‘해와 달의 교체’ 화소다. 신화에서는 쫓고 쫓기다가 하늘로 올라가 오빠는 해, 누이는 달이 된다. 하지만 우리 민담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 갈래는 누이의 요구를 거부하던 오빠가 담뱃대로 누이의 눈을 찔렀다가 미안해 바꿔 주면서 누이-해, 오빠-달로 고정되고, 흑점의 기원담이 덧붙는 형태다. 다른 갈래가 더 익숙한 민담인데 범의 위협을 꾀로 피하고 피하다가 하느님한테 기도해 동아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가 최초의 상태를 바꿔 누이-해, 오빠-달이 되는 형태다. 달인 누이가 밤이 무섭다며 바꾸자고 했기 때문에!
이 교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누이가 바꾸자고 한 까닭이다. 첫째 민담에서는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서’였는데 두 번째 민담에서는 ‘밤이 무서워서’였다. 부끄러움은 신화의 근친상간 이야기와 연관이 있다고 했는데 둘째 민담에서는 그것이 무서움으로 지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누이가 해를 차지했음에도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낮에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것이 부끄러워 강렬한 빛을 내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눈이 부셔 태양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족 같은 설명이 끄트머리에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일월 교체의 더 긴요한 대목은 하느님이 구성한 최초의 질서를 오누이가 바꿨다는 데 있다. 밤이 무섭다고 해도 한번 정해진 것은 바꿀 수 없다는 오빠의 말을 앞세워 바꾸지 않는 유형이 있는 것을 보면 구전의 현장에서 해와 달의 성별은 꽤나 중요하고 논쟁적인 주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빠는 한번 정해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정한 존재는 하느님이다. 오빠는 주어진 질서를 유지하는 쪽을 지지했으나 누이는 바꾸려고 했다. ‘부끄러워서’ 혹은 ‘무서워서’라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신화적 원형을 유지하거나, 원형으로 돌아가려는 무의식적 운동일 수도 있다. 창세신화에서 태양은 일반적으로 여성이니까!

「태양(Le Soleil)」, 15세기 제작된 타로카드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
21세기의 해와 달에 대한 상상
근대적 학교 교육이 시작될 무렵 천사와 같은 동심을 지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밝고 깨끗한 이미지를 이야기에 담고, 권선징악을 강조했다. 어머니를 해친 마음씨 나쁜 범은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이 범한테는 썩은 동아줄을 주어 하늘에서 떨어지게 했다. 그것도 밑동이 잘린 수수밭에. 아이들은 오누이가 하늘의 해와 달이 되었다는 환상에 즐거워하고, 범의 죽음에 안심한다.
혼탁한 이미지가 범람하고, 휴대폰을 통해 너무나 쉽게 그런 이미지들이 아이들의 두뇌를 공격하는 시대에 ‘예쁜’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유통되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신화에서 출발한 이 오래된 옛이야기 안에는 ‘폭력의 서사’가 숨어 있다는 것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폭력의 서사가 조성하는 두렵고 어두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두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교육학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열린 시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신화성을 되살린 21세기 해와 달의 이야기를 재창조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오빠가 해가 됨으로써 우주의 질서가 일그러져 엘니뇨 현상이 일어나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하거나, 위험에 처한 지구를 살리려고 집을 나선 어머니를 범의 얼굴을 지닌 외계인이 살해한 뒤 어머니의 얼굴로 지구를 찾아온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창안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상상력이라면 하늘로 올라가는 동아줄은 우주엘리베이터가 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범의 침공이나 월식을 지구인과 비지구생물의 이종교배로 야기된 우주적 무질서를 담은 이야기로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 해와 달이 하늘에 존재할지 알 수 없고, 상상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자산이니까!

「하늘과 별(Le ciel et les astres)」 중 부분, 1494년
출처: 프랑스국립도서관(Gallica.Bn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