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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조선시대 학교는 」교화를 펼치는 근원「이며' 」도덕적 모범을 보이는 곳「이라는 말처럼 신민에 대해 교화를 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기구였다。이러한 학교는 설립과 운영 주체에 따라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뉜다。국가가 세우고 운영하는 관학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를 꼽을 수 있다。사학에는 대체로 향촌자제들의 초등교육을 맡은 학당이나 서당 등과 함께 지방의 사림들이 공동으로 설립 운영했던 서원書院을 들 수 있다。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다。



향교의 설치와 기능
지방관학의 대표적인 기구인 향교鄕校는 인재 양성과 유교이념 보급을 위해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하에 전국에 건립되었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국가의 체제를 정비해 나가는 한편, 이를 지지하기 위해 교화정책도 아울러 펴나갔다. 교화정책의 핵심은 지방민을 교육할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 인종 5년1127에 등장했던 향교는 조선초기부터 모든 군현에 설치되었고, 중앙에서는 교수敎授와 훈도訓導를 파견하여 교육활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향교는 설치 초기부터 교육기능을 상실하였다. 그 이유는 관학을 육성하여 인재를 양성하기보다 과거를 통해 인재를 뽑아 쓰는 것에 중점을 둔 국가의 교육정책에 원인이 있었다. 자연히 향교 교육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배려는 소홀해졌고, 교수 등의 직책은 능력있는 문관文官들이 기피하는 자리가 되었다.
향교 교육의 수준은 날로 저하되었다. 간혹 지방수령들이 흥학興學의 차원에서 양사재養士齋·흥학재興學齋 등을 향교의 부속건물로 운영하기는 했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점차 향교는 문묘文廟의 향사를 하는 관학으로 그 면모만을 유지했던 것이다.
조선 서원의 탄생
16세기 후반 관학 교육의 부실을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서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향교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해 그 보조건물로 서원을 건립했고, 과거 공부의 장소로 삼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 서원의 모습은 아니었다. 조선 서원의 전형은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에 의해 확립되었다.
이황은 조광조의 도학정치론에 뜻을 같이했던 사림출신의 학자였다. 그는 유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던 중국 삼대三代의 이상사회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했다. 당시 정치권력은 훈척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개혁을 추진했던 선배사림들은 거듭된 사화士禍로 쓰러져 갔다. 이황은 전대의 실패를 교훈삼아 중앙 정치활동을 지양하고 향촌사회에서 사림들의 힘을 기르는 방향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중국학술사에서 주자성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던 학문적 도량이었던 서원 제도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의도하에 이황은 새로운 학제로서 서원 제도와 운영 방식을 제안하였다.

향교와 같은 관학은 도회지에 설치되어 번잡하므로 마음 공부에 적합하지 못하다. 한적하고 풍광좋은 곳에 자리잡은 서원은 학습의 여건이 양호하여 학문을 하기에 좋다.
또한 교육의 실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지방관은 지원은 하되 간섭을 배제하고 과거와 출세 등 현실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먼 학습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성현의 도학을 학습 토론하고 의리를 익히며 덕성을 기르는 장소로 서원이 필요하다.
이상이 이황이 제시했던 서원론의 골자이다. 향촌사회에서 교화를 담당할 주체로서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군자君子를 목표로 하는 사림들의 양성소, 이것이 이황이 바랐던 교육기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학습의 공간으로 서원의 건물구조도 강학과 내적 수양 공간으로서 강당, 동·서재와 사림의 사표가 되는 인물에 대한 제향공간으로서 사묘祠廟를 기본 구조로 정식화했다. 이황은 또한 서원 원규院規를 지어 향후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세심한 배려 역시 잊지 않았다. 그가 지은 최초의 서원규약인 <이산서원 원규>는 이후 조선 서원 운영의 기본적인 지침으로 활용되었다.
강학과 장수藏修, 서원의 교육
서원의 학습방식은 강학과 장수藏修를 내용으로 한다. ‘장수’는
체득한 지식을 스스로 수련하여 실천하므로서 덕성을 함양한다는 의미이다. 유생 스스로의 학습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보통 20세를 전후한 연령대의 유생이 서원에 출입한다고 보면, 기본소양을 스스로 갖춘 후에 학문적 심화에 학업의 목표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의 유생원유은 스스로 학습해야 하며, 한 달에 1회 개최하는 강회講會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원유들은 학습과정에서 생긴 의문점을 질문했고, 상호 토론을 통해 학습의 효과를 높혔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유생들의 자율적인 운영구조였다. 조직은 서원의 일을 총괄하는 원장院長과 원생 중에 선발되어 실무를 담당했던 장의掌議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서원의 강회를 주관하고, 원유들에게 학업의 방향을 정해주기 위해 학문과 행의가 뛰어난 인물을 산장山長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이산원규 이후 서원의 강학 교재로는 주자의 저작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도 많이 이용하였다. 또한 사묘祠廟에서 도학유현道學儒賢을 제향하는 의례도 중요한 교육적 기능을 담당했다. 원유들은 도학을 실천했던 유현의 정신과 행적을 추숭함으로서 자신들이 나아갈 학문의 사표로 삼았다.
지식의 전파처이자 사림 공론의 중심지
조선의 서원은 17세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파악한 서원의 수는 900여 개소에 이르러 조선 교육기관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이 집권하자, 서원의 정치 사회적 역할은 확대되었다. 교육적 기능과 함께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활동 기반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 시기 서원은 지역별로 특징있는 학파의 중심거점으로 기능하며 조선의 학술과 지성사를 풍부하게 했다. 대표적인 곳을 살피면, 도산서원陶山書院, 경북 안동을 거점으로 학파의 결속을 다졌던 퇴계 이황의 계승자들,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산청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남명 조식의 문인들, 그리고 돈암서원遯巖書院, 충남 논산을 중심으로 사계 김장생의 학문적 종지를 계승했고, 17세기 중앙 정계에서 유력한 정파로 활동했던 그룹들이 대표적이다. 지식의 계승과 학술의 중심으로 위상을 정립했던 서원은 사림정치의 전개과정에서 중앙의 정치문제에 대해 향촌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인 거점이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각 서원을 통해 수렴된 지방 여론이 자파계 관료나 연명상소를 통해 정치에 반영되는 양상을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서원의 쇠퇴와 대안의 부재
사림정치기 대표적인 교학기구로 존재했던 서원이었지만, 격심했던 중앙 붕당 간의 정쟁은 서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기반으로 지방 서원을 활용했던 중앙 붕당의 지휘 하에 서원의 수는 급증하였던 것이다. 무분별한 건립으로 서원 본래의 교육 기능이 쇠퇴하였고, 재정 운영상의 난맥상을 초래했다. 극단적 대립으로 파탄에 이르렀던 전대의 정치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도래한 영·정조대 탕평정치하에서 서원은 당론의 발원지이자 대민작폐의 온상으로 지탄받았고, 이어지는 국가의 통제책으로 전대에 누렸던 정치 사회적 역할 역시 부정당했다. 이후 왕정체제의 동요, 신분제의 붕괴라는 변화에 직면하여 지방의 서원과 그 운영의 주체들은 체제교학화한 성리학의 교설을 고집하거나 자신들의 신분적 지위 유지에만 급급했다. 문중서원門中書院의 등장이 바로 그러한 사례였다. 결국 서원 제도를 부정한 후 조선왕조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비록 몇몇 선진적 지식인들은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방책을 제시했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이를 견인할 주도세력의 부재는 조선 500년 왕조의 종말을 가져왔던 한 원인이었다.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