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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분청, 그 이름의 기원
분청사기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으로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며 전국의 유적·유물을 조사하였고, 그 결과로 1935년 <조선고적도보>가 출간되었다. 여기에 실린 분청사기와 백자 자료가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다. 여러 일본 학자들이 1930년대에 이루어진 초기 분청사기 연구의 주를 담당하였으며, 주로 분청사기의 발생 시기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충남 공주군 학봉리요지가 발굴·조사되어 철화분청요지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연구 중 하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분청사기는 원래 조선시대 사료에는 사기 혹은 자기로만 기록되었다. 특히 인화문 도장을 찍는 장식 기법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두고 일찍부터 일본인 학자들이 미시마데三島手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조선 후기 이용후생학파의 거두인 이규경李圭景은 저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부록인 오주서종五洲書種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분청사기 다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다완은 고려高麗 가마의 것이 상품上品인데 삼도수三島手라고 불리는 것은 견고하고, 세밀한 회문繪文이 삼도달력을 닮아
그런 이름이 붙었다. 처음 건너간 것이 지금에 이르러 400여년이다.”
여기서 삼도수라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인화문 분청사기다.
일본인들이 미시마三島로 불러온 이유는 인화문 분청사기의 문양이 미시마三島라는 신사의 달력과 유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후 1941년 10월 고유섭 선생님이 <조광朝光>에 발표한 논고<고려청자高麗靑瓷와 이조백자李朝陶磁>에서, 그간 일본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던 미시마三島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이를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 부를 것을 제안하여 오늘날 약칭인
분청사기로 불리게 되었다.
분청사기의 종류: 고려청자와 자주요를 넘어 분청사기는 발생 초기에는 태토에 잡물과 철분의 함유가 많아 흑회색을 띠었으나 차츰 정선된 회청색의 경질태토로 발전하게 된다. 태토의 종류에는 청자점토·와목점토·목절점토 등 이 있으며, 어떠한 흙을 어떻게 조합하여 쓰느냐에 따라 태토의 질과 표면의 색상이 달랐다. 백토분장을 하고 그 위에 장식한 분청사기의 태토는 고려청자보다 강도가 약한 편이고 철분 성분도 많아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하고 누런색을 많이 띤다.
유약은 철분 성분이 적은 투명유로, 두께도 얇다. 초벌구이 후 재벌구이 때의 온도도 청자보다 100도에서 150도 정도 낮아
1,100도에서 1,150도 정도다. 가마 안의 불꽃 분위기는 완전 환원염보다는 환원과 산화의 중간 단계인 중성염으로, 이 역시 청자와는 다른 부분이다. 유약은 투명유이고 감나무·소나무·볏짚 등의 재와 장석 외에 석회석·점토의 조합이 사용되었다.
분청사기는 14세기 고려청자의 기형을 계승하되 세종대에 들어서는 조선백자의 기형과 유사하거나 변형되어 양감이 보다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매병과 같은 경우는 14세기 경부터 주둥이가 작은 병으로 변하다가 15세기 들어 매병은 사라지고 대호·편병의 제작이 증가하고, 특히 제기에서 특이한 기형이 다수 보인다. 분청사기 편병은 고려청자와는 달리 두 개의 접시를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백자로도 제작되었다. ‘자라병’이라고도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편병은 누운 편호 바닥에 굽을 부착하고 구연부를 위로 향하게 한 형태로, 술이나 물을따르기 편하게 되어 있어 이전 고려시대의 서 있는 형태의 편호와는 차이가 있다. 이런 와식臥式 편호는 중국의 경우 서하西夏, 1036~1227 시기에 비롯되었다.
분청사기의 장식기법은 크게 일곱 가지로 상감·인화·박지·음각·철화·귀얄·덤벙 등인데, 모두 그릇 표면에 백토를 씌우는 백토분장과 연관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 분청사기와 함께 자주 회자되는 것이 중국 자주요磁州窯다. 자주요는 하북성 한단시 팽성진에 위치한 가마로 매우 선명한 특색과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다. 자주요는 대략 북송 초기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북송 중후기에 화장토를 바르고 조각을 하거나, 철화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소위 백지흑화白地黑花 기법으로 자주요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런 특징은 송대뿐만 아니라 금대에도 이어져 절정기를 이루고 그 영향이 계속되었으며,원대에 이르러서는 대량생산 및 대형 기물들의 제작을 시작해 그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기형은 주로 실용기가 제작되었고, 백지흑화가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결론적으로 겉모습을 보면 분청사기의 백토분장과 조화, 박지 기법, 철화분청 등은 자주요의 기본적인 백토분장 기법이나 백지흑화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두 자기는 유행 시기가 수백 년의 차이가 있어 동시기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보다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왕권 교체와 새로운 수요층의 대두에 따라 중국 북방지역에서 유행하던 자주요 신양식의 장식 기법이 고려청자의 장식과 어우러져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겠다.

분청사기의 용도와 장식 특성 : 확연한 지역색
분청사기의 생산지를 보면 계룡산, 무등산, 경상도, 경기도 등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이는 14세기 말 남해안 전역에 창궐한
왜구의 영향과 강진·부안에 집중되어 있던 요업 생산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자보다는 구하기 쉬운 원료확보도 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분청사기는 요지별로 독특한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 15세기 전반까지는 왕실 및 관청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실용기로서뿐만 아니라 왕실의 태를 담는 태항아리나 부장용 명기로도 선택되었다. 관청용 그릇에는 해당 부서의 이름을 새겨 두도록 하였다. 명문은 크게지역명·관사명·장인명 등으로, 당시 각 부처에서 사용하던 그릇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명문을 새기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섬시·내자시·사선서·예빈시·장흥고 등과 같은 관청명이나 상왕과 관련 있는 경순부·인수부·공안부·경승부·덕령부 등의 명문은 분청사기가 왕실용 그릇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또한 분청사기 명문 자료중에는 지역명과 관사명이 동시에 새겨진 것이 많은데, 이들은 주로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분청사기의 조형상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장식과 대담한 문양, 자연스러운 기형이다. 예를 들어 인화印花 분청사기는 백토를 바르고 국화나 연꽃등 각종 꽃문양이나 장식문양 등을 도장에 새겨 그릇에 꾹 누르면 그대로 문양이 나타나는 그릇이다. 음각 분청은 그릇에 백토를 바른 후 문양을 음각한 것으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銀地畵를 연상케 한다. 박지剝地 분청은 백토를 바른 후 문양을 음각하고 문양 이외의 부분을 조각칼로 긁어내어 문양만이 하얀 백토로 남게 한 것이다. 색상 대비가 뚜렷하고 간혹 긁어낸 부분에 철화 안료로 채색을 가한 것도 있다. 철화鐵畵분청은 백토를 그릇에 바른 후 철화 안료로 물고기와 새 등 각종 그림을 그린 그릇이다. 문양이 동시대 청화백자에 비해 활
달하고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 귀얄 분청은 귀얄이라는 커다란 붓으로 백토를 그릇 외면에 휘감듯이 한두 차례 휙 돌려 칠한 그릇이다. 덤벙 분청은 그릇 전체를 아예 백토 물에 풍덩 담갔다가 꺼낸 것으로 이름도 재미있다. 이 밖에 백토를 바르진 않았지만, 이들 분청사기와 동일한 태토와 유약에 상감·음각·양각·투각 기법을 사용한 것들도 있다. 위와 같은 분청사기의 장식은 생산지에 따라 약간씩 선호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조각칼을 많이 써야 하는 박지 분청은 고려청자의 본거지인 전라도 지역 분청사기에서 많이 발견된다. 또한 충청도 계룡산에는 특유의 해학이 묻어 있는 철화 분청이 주를 이루고, 반면 경상도 분청은 인화문이 촘촘히 장식된 그릇들이 주를 이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역별로 선호도와 기호가 확연히 다르니 마치 각 지방의 구수한 사투리와 같다.
자연스러운
퇴장이러한 분청사기는 15세기 중반 왕실 소용 그릇으로 백자가 지정되고, 광주 관요에서 본격적인 왕실 백자가 생산되면서 점
차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 지방에서도 분청사기의 생산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수백 년이 흐른 후 분청사기의 문양과 형태는 현대 화가인 이중섭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그림에서 재현되었고, 그 해학과 여유는 오늘날 우리의 성정에 그대로남아 있다.
- 글. 방병선. 고려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