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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06] 고려청자의 세계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6-02 조회수 : 15875














고려청자의 기원과 제작

고려청자의 처음 제작은 970년대인 광종光宗 연간에 고려가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배우기 시작하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고려의 왕실과 귀족들은 중국의 청자를 좋아했지만 그들의 많은 수요에 비해 수입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부족한 만큼 고려청자의 제작을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청자 제작으로 유명하던 오월국吳越國과의 교류를 통해 처음에는 수입품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북송이 들어서고 오월국의 불안한 상태가 계속되는 960~978년쯤 청자 장인들이 주변의 용천과 경덕진景德鎭으로 옮겨가 청자의 제작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기에 고려에서는 청자를 제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후한 대접을 제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에 따라 월주요의 청자 장인들이 고려에 왔을 것이고, 그들에게서 고려의 도기 장인들이 청자의 제작 기술을 배웠을 듯하다.
시흥 방산동 가마에서 발견된 청자‘갑술’명접시 편은 고려청자의 제작이 974년 광종 연간에 개경 가까운 시흥 그리고 배천·용인 등 중부지역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 07다. 처음에는 영암 구림리 식의 도기를 제작하던 가마 위에 중국 월주요 식의 벽돌가마길이 약 40m, 폭 2.2m가 축조되고, 갑발·집권 등의 중국식 가마용구와 중국 북송 초의 월주요 청자에서 보이는 완·발·탁잔·주자 등 녹갈색 위주의 청자 제작이 이루어졌으며, 당시 중국 청자와 구별이 혼동될 만큼 비슷하였다.
993년부터 1019년까지 27년 동안 요遼가 침입해 개경이 파괴되고 나주로 피신 간 현종에 의해 2단계로 좋은 흙이 나고, 땔감이 무성하며, 조운으로 운반에 편리한 강진 용운리와 고창 용계리 등에서 청자 제작이 이뤄진다.



고려청자의 전성시대 ‘비색청자에서 상감청자로’
1020년대에 새롭게 시작된 청자 제작은 선햇무리굽완에서 햇무리굽완과 같이 좀 더 고려화된 청자를 선보이게 된다. 녹갈색 청자에서 녹청색 유약의 청자로 바뀌며,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축조가 바뀌게 된다. 남부 지역에서 고려화된 청자 제작은 11세기 후반인 문종 연간을 거쳐 12세기 전반까지 전국의 수많은 가마로 확산되어 햇무리굽완을 비롯한 양질의 청자 제작이 꽃을 피운다.
12세기 전반에서 13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는 고려청자의 전성기로, 비색청자翡色靑瓷와 상감청자象嵌靑瓷 등의 뛰어난 작품들이 제작된 황금시기였다.
12세기 전반의 청자는 1124년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린 청자기록과 1146년에 죽은 인종 장릉長陵 출토의 청자들을 들 수 있다. 12세기 전반인 예종과 인종 연간, 왕실 및 관청 소용의 비색청자를 제작하여 공납하도록 강진 사당리요를 적극 지원하여 본격적인 청자 제작이 시작된다. 비색청자라는 왕실청자의 제작에 성공한 모습을 기록과 작품으로 보여준 것이다.
12세기 후반부터 청자의 제작이 활발해져서 전국에 수많은 요窯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강진 사당리를 중심으로 음각과 양각, 철화鐵畵 기법이 골고루 쓰이면서 기형의 다양함, 문양의 섬세하고 화려함, 맑고 은은한 유색의 아름다운 청자를 제작하게 되었다. 이로써 개경을 중심으로 한 왕실과 귀족, 관청 소용의 비색청자가 사용되었다. 또한 지방의 관청, 사찰, 서민들의 요구에 따라 해남 일대의 가마에서 조질粗質의 청자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해남 진산리 일대의 요지에서 발견된 녹갈색의 조질청자와 녹청자들이 있으며, 완도 해저에서 인양된 3만여 점의 청자들은 완·접시·발 등의 조질청자들로 생활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청자의 양상은 13세기로 이어져 확대·발전되며, 특히 상감청자의 시작은 청자의 주류를 비색청자에서 상감청자 중심으로 변화·발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3세기 전반의 청자는 남송과의 국교 단절로 인해 중국도 자의 자극이 없어지고, 고려 무신武臣들의 주체성 진작에 따라 고려청자 특유의 기형과 문양 기법이 발전되는 모습으로 가장 원숙하고 고려화된 기형과 문양, 기법이 사용된 전성기 청자의 양상이다. 무신 정권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바탕으로 핀 화려한 꽃이 상감청자이다. 청자의 기형이 단정한 형태에서 유려한 모습으로 바뀐다. 목이 긴 주병이나 S자형 매병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우아한 곡선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청자에 시문된 무늬도 회화적인 소재가 등장하여 연못·버드나무·오리 등으로 구성된 여름 한낮의 정경을 묘사한 듯 정겨움이 묻어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난 줄기찬 한국 미의 특징은 바로 ‘선’이라 할 수 있는데, 고려 상감청자 중에서 유려한 곡선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은 독자적인 한국적 미감이 13세기 상감청자에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상감청자의 술잔과 술병에 즐겨 새긴 무늬 중에는 소박하고 조촐한 들국화가 유독 많다. 당시 문집들에도 소박한 국화에 대한 고려인들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들국화는 자연에 귀의하려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들국화를 바라보다’ 같은 옛 문인들의 시구에서 볼 수 있듯이 들국화가 자연에 귀의하고자 하는 그 당시 고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들국화 못지않게 많은 사랑을 받은 운학雲鶴 무늬는 청자의 표면을 창공으로 여겨 비상하는 학을 표현하였다. 13세기 청자에 나타난 고려의 독자적 장식무늬와 갓 맑은 유색은 고려화된 청자의 특징이다.


격동의 14세기, 그리고 청자의 세대교체
중국의 기술을 바탕으로 고려 초기에 청자가 만들어지고 차차 중국의 옥과 같은 비색청자를 시도하던 12세기를 넘어 13세기에 고려화된 상감청자는 깊은 예술적 감동을 던져준다.
무신 정권을 바탕으로 고려의 자주성이 강조되었던 시대성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을 겪으면서 체득한 청자의 고려 화는 고난을 겪으며 성숙해지는 인간 삶의 모습과도 비유될수 있다. 13세기 후반의 청자들은 부안 유천리 요산 고려청자들로 기형과 기법·문양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자음각, 양각의 접시, 발, 매병, 주병과 투각의 의자들, 상감기법으로 완성된 청자 도판, 병, 호, 주자, 매병, 탁잔 등 다양하며, 철화·철채·동화·동채 기법이 시문된 청자들과 백자편들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기형과 문양·기법에서 중국적요소가 사라지고 고려적 기형과 문양의 세계가 확대되어 가는 것이 이 시기 청자의 특징이다.
14세기 전반은 원元 세력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에 의해 이끌어지던 시기였다. 청자의 기형에 있어 대형의 매병·호·의자 등이 만들어지며, 측면이 편평한 편호가 많이 만들어진다. 고족배高足杯와 잔·접시류가 많아졌으며, 기벽은 두꺼워지고 유색은 회청색계로 바뀐다. 모란당초문, 어문, 용문, 봉황문, 연화문 등이 새롭게 상감청자에 나타난다. 14세기 후반은 공민왕과 우왕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다. 원과 명의교체가 이루어진 이 시기에 지배세력인 권문세족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대두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신흥사대부들이다. 이들은 개혁정치를 주장하였다.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신흥사대부들은 실생활에 널리 쓰일 수 있도록 튼튼하고실용적인 그릇의 대량생산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왜구들의 침략으로 해안가에서 사람이 살 수 없고 조운을 통해 개경에 운반되던 조운선이 왜구들의 습격을 받아 막히므로 육로를 통한 육운이 요청되던 때였다. 강진과 부안의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청자 가마들은 왜구들의 습격으로 파괴되고, 1376년 조운제도가 폐지되고 육운이 실시된다. 그리하여 이들 새로운 신진사대부층의 견해와 요구에 따라 전국 내륙지방 곳곳에 청자 가마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변화가 확대된다.
이처럼 14세기 후반은 도자에 있어 실생활화가 촉진된 새로운 전환의 시기였고, 이러한 도자의 양상은 조선 초기의 분청자
제작의 모체가 되었다.

 
- 글. 윤용이.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이미지 출처. <천하제일 비색청자> 도록(국립중앙박물관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