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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씨름으로 본 한국 문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4-18 조회수 : 3150







 






명칭과 어원•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맞잡고 힘과 기술을 이용해 상대를 넘어뜨려 승부를 내는 경기다. 씨름은 각저, 각저角抵, 각저殼抵, 각력角力, 각희角戱, 각희脚戱, 상박相搏, 치우희蚩尤戱, 졸교 , 질교迭校, 쟁교爭交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씨름의 어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15세기에 상박相搏을 ‘실훔’이라 한 것이 처음 확인된다. 그 뒤 실홈16세기, 시름17세기, 18세기, 19세기 등을 거쳐 씨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으로 본 씨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씨름의 흔적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만주의 통구에 위치한 각저총4세기 말~5세기 초 안의 벽화에는 심판인 듯한 노인이 바라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역사力士가 씨름을 하는 그림이 있다. 상투를 튼 두 씨름꾼이 허리에 샅바를 동여맨 채 맞붙어 씨름을 하는 모습이다. 원래 생존을 위한 싸움 기술로 시작된 씨름은 무예에서 점차 놀이 내지 의식으로도 이용됐다. 일찍이 고대 사회에서는 나라의 행사 때 씨름을 공연 형태로 선보이는가 하면, 나라의 장례 때에도 통과의식의 하나로 씨름을 베풀었다. 고분벽화 속의 씨름도 그러한 장례의식과 관련된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때까지 씨름은 군사들의 힘과 재능을 평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고려 말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씨름이 국왕의 관람용 유희로 자주 행해졌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씨름은 여전히 군사들의 훈련 수단이자 민간의 놀이로 성행했다. 하지만 씨름이 군사를 뽑는 제도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전쟁 기간 중에도 군사들에게 씨름을 하게 한 내용이 나온다. 백병전白兵戰에 대비한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씨름을 연마케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도입돼 씨름의 군사무예적 기능은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씨름은 농촌 공동체의 놀이로 중시됐다. 새해 초에 마을의 풍년을 바라거나 모내기철에 모를 심기 위한 ‘물 대기’ 수단으로 씨름을 했다. 또한 고된 김매기를 마친 뒤에는 농민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오락을 제공하거나, 추수기에는 수확에 감사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씨름을 함께 즐겼다. 씨름은 개인 경기이지만 자연 마을이나 지역의 대항전으로 발달해 나갔다. 다만 농사의 절기와 관련을 갖고 열리다 보니, 그 지역의 여건에 맞게 발달하였다. 해마다 농사와 함께 반복되는 주기성을 띠면서 씨름은 자연스레 전국적인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착됐다. 그 사실은 18세기에 편찬된 유득공의 《경도잡기》나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서 뒷받침될 뿐 아니라 김홍도가 그린 <씨름>이나 유숙의 <대쾌도>에서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이후의 씨름•
개항 이후 학교 교육과 스포츠가 도입되면서 씨름도 근대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 첫 계기는 학교의 운동회와 지역 단위로 열리는 각종 씨름 대회였다. 계속된 대회의 개최를 통해 근대적인 규칙과 경기 방식이 씨름에도 적용된 것이다. 하지만 씨름의 본격적인 근대화 작업은 1927년 ‘조선씨름협회’를 결성하면서 시작됐다. 그동안 지역별로 시행하던 경기방식을 왼씨름으로 통일하고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그러자 지역 단위에 머물던 씨름은 점차 전국 단위의 대회로 확산돼 나갔고, ‘국기國技’라는 인식 아래 국권회복의 동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조선씨름협회는 폐지와 설치를 반복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됐다.
씨름협회가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광복 후 1947년 ‘대한 씨름협회’로 명칭을 바꾸면서부터다. 그해 제28회 전국체육 대회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씨름은 이듬해인 1948년 제 2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그 뒤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던 씨름은 1980년대 프로씨름과 함께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가 생겨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이만기·이봉걸·강호동 등과 같은 걸출한 씨름 스타가 배출되면서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씨름단이 해체되면서 씨름계는 다시 어려움에 처한다. 이에 정부는 씨름을 진흥하기 위해 2006년 ‘100대 민족문화상징’ 중에 하나로 씨름을 선정하고, 2012년 ‘씨름진흥법’을 시행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7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과 함께 현재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절차를 밟고 있는 것도 씨름 부활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다.


전통 스포츠의 대표성•
씨름은 가장 오래된 놀이문화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국민 스포츠라는 점에서 한국의 경기문화를 대표한다. 과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명절, 장날, 운동회, 축제 등 각종 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왔다. 씨름은 경기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1927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분포된 왼씨름, 경기도와 전라도에서 주로 하는 오른씨름, 충청도 일원에서 많이 하는 띠씨름 등이 있었다. 샅바를 두르되 왼손으로 샅바를 잡으면 왼씨름이고, 오른손으로 샅바를 잡으면 오른씨름이다. 띠씨름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하는 씨름으로 일명 통씨름이라고도 한다. 1927년에 조선씨름협회에서 왼씨름을 할 것을 장려했으나, 왼씨름과 오른씨름은 그 뒤에도 혼용돼 왔다. 그러다 1972년에 이르러 왼씨름으로 다시 통일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씨름은 강변의 모래밭이나 장터, 마을 공터에서 열렸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애기씨름10대 이하, 총각
씨름10대, 상씨름20대 이상으로 구분돼 차례로 진행됐다. 상씨름의 최종 경기에서 이긴 승자에게는 ‘장사’의 칭호가 부여되며
황소를 상으로 주는데, 장사는 황소를 타고 마을을 돌며 축하퍼레이드를 벌였다. 씨름에서 황소를 주는 관행에는 ‘농사일을 더 부지런히 하라’는 격려의 뜻이 담겨 있다.
마을공동체의 유산•씨름은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오랜 역사를 거쳐 현재까지 전승돼 온 민속놀이이자 스포츠다. 씨름은 한 마을의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승부를 떠나 사회적 결속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하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한 개인의 경기이면서 그가 속한 마을의 집단적 축제의 성격을 띠는 점은 공동체와 함께 발달해 온 한국 씨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씨름은 개인과 개인이 승부를 겨루는 것이 중심을 이루지만, 명절 때나 축제 때에는 마을과 마을이 집단적으로 승부를 겨루며 함께 즐겼다. 특히 음력 1월 15일, 5월 5일, 7월 15일, 8월 15일에 벌어지는 여러 놀이문화 가운데 씨름은 절대 빠질 수 없는 경기이자 놀이다. 개인의 무예이면서 동시에 그가 속한 집단적인 대동놀이라는 점은 공동체와 함께 발달해 온 씨름이 가지는 매력이다. 개인 간의 씨름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만, 집단이나 단체로 할 때는 공동체 전체의 역량을 반영하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마을 간의 대항전은 공동체 전체의 참여와 후원 그리고 단결이 요구된다. 실제로 역사 속의 씨름에는 개인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공동체가 있었고 화합이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 울음거리, 대화거리가 바로 씨름이었다. 현재에
도 씨름은 화합의 장, 축제의 장으로 우리 삶 속에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점이 씨름의 공동체성이 갖는 사회적 기능이자 의미다.


무형유산으로서의 특성•
씨름은 두 사람이 맨손으로 힘과 기술을 겨루는 경기다. 하지만 차거나 때리는 격투기와 달리 두사람이 서로 샅바를 맞잡고 상대를 넘어뜨리면 끝이 난다. 따라서 자칫 격렬해 보이지만 상대와 몸을 밀착한 상태에서 힘과 기술로 겨루는 만큼 철저하게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진다.

씨름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별·나이·체급 등 모든 차이를 뛰어 넘는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비폭력성을 갖는다. 경기에 앞서 인사로 서로의 존경심을 표시하고, 무릎을 맞대어 앉아 경기를 준비하며, 상대와 관중 그리고 지도자나 심판 등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경기 방식을 취한다.

경기 및 수련 과정에서 경험하는 엄격한 규칙의 준수는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정신 등을 기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나아가 씨름은 공동체 의식의 제고와 함께 문화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매개이자, 민족 동질성을 확인해 주는 소중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씨름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무형유산의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시에 시대변화 속에 독자적인 자생력을 갖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실제로 그동안 씨름은 현대의 다양한 레저오락·놀이와 스포츠 활동에 밀려 보기가 어려워졌다. 씨름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보전·관리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진흥 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될 필요가 있다.

현재 씨름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는 절차가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3월 등재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조만간 씨름이 또 하나의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랐다는 낭보가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 글. 심승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한국사 교수.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무예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