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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장용영고사>는 1785년부터 1800년까지 16년간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에서 일어난 일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9책 9권이었으나 현재는 4권이 실전失傳되어 8책만 전해진다. 이 책은 관원의 임면任免, 숙위宿衛, 왕이 거둥할 때의 시재試才, 시사試射, 호위扈衛, 군사훈련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중 시사 부분에서 검법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장용영고사>에는 총 15회의 시사에 30회나 검법이 등장한다. 세부적으로 시행된 검법은 마상쌍검馬上雙劍 8회, 마상월도馬上月刀 8회, 신검新劍 1회, 용검用劍 2회, 청룡도靑龍刀 2회, 쌍검雙劍 2회, 예도銳刀 1회, 왜검교전倭劍交戰 3회, 제독검提督劍 1회, 월도月刀 1회, 협도挾刀 1회 등이다.
1790년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기 전까지는 마군馬軍들이 시행하는 마상쌍검과 마상월도만을 실시하였다. 1789년 <무예도보통지>가 나오기 바로 전해에 장용영에서 중일 시사中日試射를 시행할 때부터 보군에게 신검본국검을 가르치고 보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군의 도검무예를 전담하는 용검군의 군사들에게 <무예도보통지>의 검법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1792년 용검쌍수도을 지급하고 나서다. 이어 1795년부터는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있는 신검, 쌍검, 예도조선세법, 왜검교전, 제독검, 월도, 협도, 용검 등 한·중·일 삼국의 다양한 검법이 확산되었다.
1789년 신검을 시작으로 1792년 용검 1기, 1795년 청룡도, 쌍검, 예도, 왜검교전, 제독검, 월도 등 6종류의 검법이 장용영 군사들에게 보급되었다. 1796년에는 협도, 왜검교전, 청룡도의 3종류 검법, 1797년에는 청룡도, 쌍검, 왜검교전의 3종류 검법, 1799년에는 용검이 전수되었다. <장용영고사>에따르면 청룡도를 제외한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8종류의 검법이 장용영 군사들에게 전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있다.
<장용영고사>에 실려 있는 <무예도보통지>의 검법은 각각의 개별 기법을 습득하여 전문적인 살수殺手를 양성하기 위한 조치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장용영의 용검군처럼 검법을 습득하는 군사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사들의 검법 기량을 향상하다
<만기요람>은 1808년 서영보와 심상규에 의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재용편’과 ‘군정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예試藝와 관련한 내용은 군정편에 실려 있다. 시예는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군사들을 소집하여 무예시험을 통해 기량 향상 여부를 단계적으로 점검하는 규정이다. 이를 통해 우수한 군사들에게 상을 하사하여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위무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서울 도성을 방어하는 중앙군영의 군사들에게 시행된 대표적인 시예는 중순中旬과 관무재觀武才다. 중순은 조선 후기에 군사들에게 활쏘기 및 검법을 권장하고 습득시키기 위해 실시한 시험이다. 중순 시예는 삼군문이 동일하게 마군과 보군으로 구별되며, 초시初試가 기준이다. 군사들이 시행한 기본 응시 과목인 원기元技와 특별 응시 과목인 별기別技로 구분되었다.
공통적으로 시험을 본 검법의 유형은 월도, 쌍검, 검, 등패 등이다. 실제로 마군은 별기에서만 마상월도, 마상쌍검의 2기를 실시하였고, 보군은 원기에서 등패, 별기에서 왜검교전, 예도, 협도 등 3기의 검법을 시행하였다. 다만 보군의 별기에서는 응시자 지원 제한 규정으로 왜검교전수가 예도와 협도를 응시할 수 없고, 예도와 협도수가 왜검교전을 중복해서 응시할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이는 군사들이 여러 종류의 검법을 전체적으로 훈련하기보다는 한 가지 검법 지식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훈련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한 제도였다.
관무재는 국왕이 친히 열병한 뒤에 당상관부터 그 아래군관 및 한량에게 실시하는 무과시험이다. 관무재 시예는 기본적으로 중순 시예와 동일하다. 다만 군사들이 도검무예를시험 본 유형은 대부분 보군에 치중되었다. 도성을 지키는 삼군문 군사들이 공통으로 시행한 원기는 검예, 제독검, 언월도,쌍검, 본국검, 용검이었다. 별기는 왜검교전, 예도, 협도, 언월도, 제독검, 본국검, 등패 등으로 지정되어 시행되었다. <무예도보통지> 안에 위와 같은 검법들이 실려 있으며, 군영에서무과 시취試取 과목으로 활용되고 군사들에게 보급되었다.
<무예도보통지> 조선의 검법을 표준화하다
<장용영고사>와 <만기요람>을 통해 <무예도보통지>의 검법이 실제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장용영 군사들에게 전수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의 군사훈련은 북방의 여진족을 방비하기 위한 진법陣法, 집단 군사훈련 체계에 주목하는 ‘선진후기先陣後技’의 전술이 주를 이뤘다. 이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대규모 전술 대형에서 분군법의 하나인 속오법束伍法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전술부대의 양성과 근접전을 펼칠 수 있는 단병전술로 변화하였다. 검과 창을 중시하는 살수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조총을 쏘는 포수, 활을 쏘는 사수등 삼수병 체제로 전환되어 원앙진鴛鴦陣과 같은 단병전술이 빛을 보게 되었다.
반면 조선 후기의 군사훈련은 ‘선기후진先技後陣’으로 조선전기와는 대조적인 방향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후기 군영 간의 훈련 체계와 개인 무예 자세의 표준화를 위해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해 군사들에게 보급하는 동시에, 각 군영 군사들에게 1인 1기의 검법을 습득하여 전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수많은 검법, 현재로 전해지다
과거 조선의 검법이 군영의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면, 현재는 전통무예의 한 종목으로 전통검법 연무대회와 조선시대 무예 관련 행사에 공연 콘텐츠로 재현되고 있다.
소중한 조선의 검법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승가치, 전승능력, 전승환경을 갖춘 무형문화재 종목 지정과 검법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통한 전문가 교육 양성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다양한 검법의 재현을 위하여 학제 간 교류를 통해 다양한 전공 전문가들에 의한 철저한 학술적 고증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의 검법을 활용하는 무형문화유산 콘텐츠가 풍부해질 수 있다.
아울러 조선의 검법은 전통 스포츠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국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 검법으로 체계화될 때,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몸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는 전통 스포츠로 발돋움할 수 있다. 특히 국가에서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조선의 검법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질 때 전통무예의 하나인 검법의 미래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조선 후기 검법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인식과 이해가 대중에게 확산될 때 우리 전통 무형유산인 조선의 검법이 전통 스포츠로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 글. 곽낙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