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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한·중·일 삼국 도자 기술과 예술을 넘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6-14 조회수 : 7754


 





완벽한 기술 추구
중국은 신석기 시대 앙소문화 토기와 용산문화 흑도 등 을 생산하였다. 세계를 놀라게 한 진시황 병마용을 통해서는 완벽한 조각과 성형 실력을 선보였다. 기원후 1, 2세기인 후한대 이후에는 청자를 생산하면서 도자기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였다. 중국 동남부 절강성 북부 월주 지역을 중심으로 일상용기는 물론 부장품인 신정호神亭壺와 천계호天鷄壺 등의 독특한 기형의 청자가 생산되었다. 이들 그릇은 한국과 일본에도 유입되어 상류 계층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청자 이외에도 수나라 이후에는 형요를 대표로 하는 북방 가마에서 눈같이 하얀 백자를 생산하여 남북조 시대를 거쳐 당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오랜 기간의 경험과 꾸준한 실험에서 비롯되었고, 풍부한 원료와 노동력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시기라 일컫는 8세기 당나라 시절에는 세계 도자 시장을 석권한 당삼채라는 연유도기가 탄생하였다. 당삼채는 화려한 색채 배합과 이슬람풍 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되어 무덤 부장용이면서 장식품으로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와 이슬람, 유럽 등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풍만한 당나라 미인과 실크로드를 누볐을 낙타와 말, 인물상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형형색색의 인물에서 당의 국제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당삼채뿐 아니라 당대 들어 차문화의 흥기를 바탕으로 월주요 청자는 더욱 색상이 비색에 가까운 신비로움을 띠면서 전 세계로 수출되는 한편, 그 기술력을 비밀스럽게 발전시켰다.

북방에서는 형요와 정요에서 백자를 생산하여 황실은 물론 아시아 전역과 아프리카 등지까지 퍼져나갔다. 그런가 하면 남방의 호남성 장사 지역에서는 산화동과 산화철을 안료로 사용한 이국적인 양식의 그릇을 생산하여 당의 국제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당삼채와 월주요 청자, 형요 백자, 장사요 도자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글로벌 도자 예술이자 상품이었다.

송대 들어서는 송대 10대 명요로 불리는 남북방의 다양한 요장에서 청자와 백자 등을 생산하였다. 은색의 정요 백자와 흡사 조선 분청사기와 같은 백토 분장의 자주요, 북방의 청자인 요주요, 중국인들이 최고로 치는 천하제일 여요, 산화동을 사용하여 추상적 효과를 낸 균요 등의 북방 자기가 있는가 하면, 전통적인 월주요를 비롯해 항주의 남송 관요, 새로이 부상한 용천요, 청백자를 생산한 경덕진요, 흑유 다완의 신세계를 연 복건성의 건요 등이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자기로 자리하였다.
한국은 선사 시대 토기를 거쳐 삼국 시대 고구려, 백제,신라에서 중국 도자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각기 개성 있는 토기를 생산하였다. 백제와 신라 토기는 일본으로 기술이 전파되어 중국, 한국, 일본 도자 교류의 장이 활발히 열렸음을 보여주었다.

통일신라 시대 들어서는 고화도 경질도기 시대가 개창되었다. 통일신라의 국제성을 잘 보여주는 다양한 디자인의 토우와 문양 장식이 토기 위에 펼쳐졌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에는 연유도기 생산도 이어져 커다란 기술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한국의 도자기가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건 고려 시대 청자였다. 고려 초 중국 장인의 기술 협력을 받아 생산된 청자는 차문화의 유행 및 문신들의 취향과 선호에 힘입어 강진이라는 천혜의 청자 원료 산지에서 고려 특유의 청자로 거듭났다. 12세기 들어 신기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고려 도공의 끊임없는 실험정신 등에 힘입어,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기술되었듯이 세계 최고라는 중국의 여요 청자에 버금가는 색상과 조형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철화청자와 동화청자,청자 도판과 각종 연적 등 장식과 조각, 디자인에서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였다. 무신들의 미의 세계를 보는 듯한 강렬한 백토와 흑토의 색상 대비를 활용한 상감청자는 중국과 다른 독특한 고려청자의 세계를 선보이며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조몬 토기와 야요기 토기를 거쳐 하지키와 하니와 같은 독특한 토기문화를 형성하였다. 고화도 환원염 토기인 수에키 시대를 거쳐 나라 시대에는 중국에서 수입된 당삼채를 모방한 나라삼채를 제작하여 연유도기 생산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비록 자기 생산은 뒤졌지만 도코나메, 아쓰미를 비롯해 비젠, 시가라키, 단바 등의 일본 각지에서 지역 양식을 바탕으로 한 고화도 도기를 생산하여 일용기의 대부분을 충당하였다. 고급 그릇인 청자와 백자는 중국과 한국에서 수입하였지만, 이후 차문화의 유행과 독특한 일본 양식에 대한 기호가 상승하면서 세토와 미노 지역에서 시유도기가 생산되어 중국 자기를 모방한 양식과 일본 고유 양식 등을 선보였다. 이러한 일본적인 특성은 이후 다도茶陶를 중심으로 일본 도기에서 꾸준히 나타났다. 모모야마 시대 센리큐같은 선승의 등장과 지역 도자 생산 붐은 라쿠다완과 세토, 오리베, 비젠 등지에서 생산된 일본 도기의 전성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대부와 황제, 쇼군 그리고 글로벌 수요층을 위한 그릇14세기 원제국 시절 코발트 안료를 사용한 청화백자가 개발되면서 중국 자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원대 이후 경덕진의 장인들은 이제 황제뿐 아니라 전 세계 중국 도자 마니아가 된 글로벌 수요층을 위한 그릇을 생산하였다. 청화백자와 각종 백자, 청자 등과 다채로운 장식의 연유 그릇들은 세계 최고의 기술을 바탕으로 화려한 장식과 사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청화백자는 당시 전 세계로 수출되어 새로운 무역시장을 개척하였고 월주요를 대신한 원대 용천요 청자도 한몫을 하였다. 특히 경덕진의 도공들은 청화백자에 주 수요층인 이슬람의 양식을 반영하여 이슬람풍 문양과 기형을 새롭게 제작하여 수출하였다. 원말명초 청화 안료의 수입이 원활하지 못한 시기에는 산화동을 이용한 유리홍 자기가 이를 대신하였다.

명대 들어 백자나 청화백자에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다시 저화도로 소성한 오채자기가 개발되어 황실 전용뿐 아니라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 오채자기는 황실 전용의 경덕진 어기창뿐 아니라 인근의 민요에서도 생산을 담당하였다. 이들 요장에서는 다양한 양식의 그릇을 생산하고 기술을 개발하였다. 명 중기 이후에는 이슬람을 통해 유럽으로 중국 청화백자가 수출되어 유럽 전역에 중국 도자 붐을 일으켰다.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어 청 후반에는 유럽에 시누아즈리라는 중국 양식의 유행을 가져왔다.

명말청초에는 문인풍의 청화백자가 한 시절을 풍미했으며, 이후에는 분채로 불리는 법랑채라는 새로운 기법이 탄생하여 경덕진 여요창에서 강희와 옹정, 건륭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제 기술적으로는 표현하지 못할 게 없는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어 유럽 자기의 탄생에 밑거름이 되었다.

반면 한국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그릇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조선 도자는 기술력의 표현이 아닌 품격과 격식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화려한 고려청자 대신 분청사기라는 백토 분장의 청자가 조선 초기에 관수용과 민수용으로 전국 각지에서 제작되었다. 분청사기는 일본에도 전해져 화려함에 대비되는 적조미와 자연미 덕에 다도구로 애용되었다. 세종 이후 조선의 예기로 자리한 조선백자는 소박과 검소함을 숭상하고 예식을 중시한 사대부들의 미감이 드러난 순백자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안료를 사와 제작해야 하는 청화백자,산화철을 사용하는 철화백자 등이 경기도 광주의 관요에서 생산되었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과 곧 이은 병자호란은 백자 생산에도 영향을 미쳐 코발트 안료를 중국에서 사와야 하는 청화 백자보다는 철화백자가 유행하였다. 임진왜란 전후 시기에는 일본에 피랍된 도공들을 통해 도자 기술이 일본에 전수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영조와 정조 시기에는 다시 청화백자 생산이 재개되고 정치·경제의 안정과 번영에 힘입어 문인풍의 산수화와 다양한 길상문이 궁정 화원들의 붓끝에서 백자 위에 재생되었다. 비록 동 시기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무역도자로서의 기능은 극히 일부분이었지만, 왕이 곧 사대부였던 조선시대 분위기답게 순박한 백자와 고품격 청화백자가 양대 축을 이루어 중국과는 다른 미의 세계를 연출하였다.

일본은 17세기 에도 시대 이후 한국과 중국의 기술 전수로 백자 생산을 개시하였다. 아리타를 중심으로 한 규슈 일대에서 청화백자와 금채백자, 적색을 주요 장식으로 하는 가키에몽이라는 독특한 양식의 백자를 제작하였다. 나베시마와 구다니등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백자와 청자들은 각 지역의 쇼군과 귀족들에게 애용되었다. 이들 그릇에 자주 나타나는 일본 전통복장인 기모노에 등장하는 파격적인 디자인과 적색을 위주로 한 색상 배합, 금채의 활용 등 독특한 일본 양식을 갖추었다. 특히 일본은 명말청초 중국이 국내의 혼란으로 유럽으로의 도자무역이 여의치 않자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규슈의 이마리 항구와 나가사키를 출발하는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린 일본의 청화백자와 오채자기는 유럽 각지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선호되었다. 이러한 일본 무역도자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 등지에서 소위 자포니즘이라는 일본풍 양식의 대유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간 중국 도자의 독무대였던 유럽 자기 시장을 일본이 양분하게 되었다. 일본은 독특한 다도문화의 유행과 다기의 중시로 중국이나 한국과는 다른 독특한 미감의 그릇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 백자와는 별도로 전통적인 도기도 꾸준히 생산하여 세토와 단바 등지를 중심으로 자기와 도기의 병립을 이어나갔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대량생산을 위한 유럽의 기계와 가마 설비, 기술을 도입하여 또 다른 유신을 이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