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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 표암, 조선 후기 예원을 이끄는 문인화의 정수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6-06-14 조회수 : 3597
 
 

표암, 조선후기 예원을 이끄는
문인화의 정수


글.
이원복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사)역사-여성·미래 상임대표







문인화文人畵, 개결한 선비정신의 가시화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국시國是로 건국했으며, 이를 더욱 심화 발전시켜 조선성리학을 이룩했다. 이를 바탕으로 단일 왕조로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드문 500년 이상 지속됐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그림을 홀대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중국 최초의 미술사 교과서 격인 당唐 장언원張彦遠,815~875은 그림은 교화를 이루며 인륜을 돕고, 신묘한 조화를 탐구하며 그윽하고 미묘한 것들을 헤아리게 하니 그 공이 6경經과 같다고 보았다. 그림에 능했고 그림 감상과 수집을 즐긴 성군聖君들도 적지 않다. 그림을 생계 수단으로 한 전문적인 직업 화가들의 신분이 중인中人이기에 이에 따른 폄하이지 그림 자체를 천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에도 직업이 아닌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가 있다. 전통사회에선 후자를 문인화가라 불렀고 그들의 그림을 문인화라 칭했다. 그림 그리는 붓과 글씨 쓰는 붓이같고, 문자가 그림에서 비롯된 한자문화권에서 탄생한다. 제왕과 고위직 관리 그리고 선비에 이르기까지 지식층에 의한 시와 그림 및 글씨가 어우러진 독특한 예술이다.

기득권을 지닌 지배층의 전유물이며, 삶의 고뇌와 처절함 그리고 땀이 담기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본 공산주의 미학에선 문인화를 유한계급의 한가함과 무료를 달래기 위한 심심풀이 정도로 간주해 폄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한도歲寒圖>를 남긴 김정희의 예처럼, 멸망한 왕조의 후예이거나 당쟁과 서얼 등 구조적 모순에 처해 신고辛苦로 허덕인 순조롭지 아니한 삶의 주인공들이 적지 않은 실상을 간과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중국을 비롯해 북한 역시 문인화에 대한 굴절된 시각에서 벗어나 본래의 위상이 회복된다.

문인화가들은 전문화가가 아니기에 때로는 표현이 서툴고 다소 묘사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양식에 구애됨 없이 사물의 외적 묘사인 형사形似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마음, 즉 심경을 강조하며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렸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처럼 때론 평론가이며 수요자이기도 한 이들에 의해 새로운 화풍이 시도된다. 국제적인 화풍을 수용해 화단에 보급시키는 데에도 영향력이 컸다. 동아시아 그림의 역사는 직업화가와 문인화가 양자가 함께 짜낸 비단과 같은 것이다.




강세황의 생애와 예술, 문인화가의 표상表象
강세황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지칭된다. 그는 ‘우리 문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진경시대 중심에 위치한다. 문물이 융성한 18세기 영조1694~1776·정조1752~1800재위기에 화단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문인화가이다. 적극적으로 붓을 든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서화가로 ‘조선의 그림 신선畵仙’ 김홍도1745~1806경와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신위申緯,1769~1847의 스승이기도 하다. 79세까지 장수와 긴 화력畫歷으로 시와 글씨를 비롯해 14명 이상 선후배 그림에 붙인 화평畫評, 전 장르를 아우르는 상당량의 회화를 남겼다.

표암은 강현姜鋧, 1650~1733과 정경부인 이씨 소생 3남6녀 중 막내로 부친이 64세 때 태어났다. 태어날 때 등에 흰 얼룩무늬가 있어 표암이란 호를 얻었다. 그는 15세에 혼인해 5형제를 두었으니 17세에 맏아들 완, 55세 때 막내인 서자 신이 태어난다. 서울서 살다 32세 때 처가인 안산으로 이주해 61세 때 출사出仕로 귀경했다. 30년 가까이 머문 안산은 그의 학문과 예술의 배양토이며, 이곳에서 김홍도와 사제의 연도 맺었다.
장수 가문으로 조부 강백년姜栢年, 1603~1681부터 3대에 걸쳐 70세가 넘도록 관직에 있었으니 김정희가 쓴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 편액이 이를 알려준다.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호조참판과 병조참판에 이어 오늘날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을 두차례 역임했다. 72세 때인 1784년 건륭제乾隆帝, 1711~1799 천수연千叟宴에 부사로 연행에 참여했다. 76세 때 맏아들과 김홍도와 금강산을 탐승했고, 3년 뒤인 1791년 63세 된 맏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자 보름 후 79세로 표암은 이생을 마감한다.


소북파小北派에선 표암·허필許佖, 1709~1768·정철조鄭喆祚, 1730~1781·정수영鄭遂榮, 1743~1831 등 그림으로 명성을 떨친 이들 풍류문사를 화안고사畫眼高士라 칭한다. 강세황은 소북 명문가의 후예이나 환갑을 넘기고 벼슬에 나간다. 이는 둘째 아들 강완1739~1775보다도 늦었으니 그가 시문서화에 잠심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조부 때부터 모은 방대한 서적과 함께 긴 하루 오랜 세월은 백수白手이자 포의한사布衣寒士인 그에게 자연스레 학문과 예술에 전념께 했다. 오랜 연찬硏鑽과 더불어 적지 아니한 서화를 남긴 계기가 된다.

표암은 여행과 사생을 통한 전통적인 문인화와 서양화풍의 원용 등 청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인다. 심지어 채색으로 난초를 그렸고, 1782년 그린 70세 <자화상>과 <복천 오부인 초상>등 의연하고 당당한 초상과 인물화, 1747년 복날 안산 청문당에서의 모임을 담은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 등 풍속화, 조촐하고 담박한 산수, 깔끔하고 조촐한 화훼초충, 조선 선비 그림의 백미인 사군자, 유려한 글씨, 따사로운 시문詩文 등 다양한 화목畵目에 두루 손을 대었다. 뛰어난 심미안에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그는 서화 비평과 활발한 작품 창작 등 족적이 두드러지니 명실상부한 예원의 총수였다.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은 40대 중반 안산 시절에 그린 중년의 대표작이자 그의 진경산수에서 최고의 명품으로 꼽힌다. 이 화첩 내 <태종대>엔 화면에 자신을 등장시켰고, <영통동구靈通洞口>에선 수묵 위주이되 담청과 담황의 맑은 색조 원용,투시도법에 의해 시선을 모으는 점, 다른 문인화가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화목과 청신한 감각으로 정리되는 화경에 과감한 시각, 과감하고 참신한 새로운 시도 등이 돋보인다. 하지만 격조를 유지한 문인화는 말년까지 견지한다. 정도의 차이는 없지 않으나 예원에서 그의 역할은 19세기 김정희의 역할에 버금간다 하겠다.

예술을 통해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교유
표암을 주제로 한 특별전은 네 차례나 열렸다. 1975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 2003년 세밑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2013년 5월 간송미술관, 네 번째는 2013년 6월 탄신 30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개최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이다. 일본에 유출되었던 기념비적인 합작품<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가 귀국해 네 번째 전시에서 공개되었다.균와는 ‘대나무 움집’이니 ‘대나무가 있는 별장’의 의미를 지닌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인 신광익申光翼, 1746~?의 호이며 모임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1763년 안산 신광익 집에서 표암·심사정沈師正, 1707~1769·허필·최북崔北, 1712~1786 이후을 비롯해 아들뻘인 김홍도·김덕형金德亨, 1746~? 등 50대 5명에 10대 3명의 모임이니 나이와 신분을 떠난 노소동락老少同樂이 아닐 수 없다.

책상에 기대 거문고를 타는 이가 51세 강세황, 그 뒤로 가장 나이 어린 꽃 그림으로 이름 난 김덕형, 앞에 퉁소를 부는 이가 19세의 김홍도, 신을 벗고 안석에 기댄 채 편한 자세를 취한 18세 신광익, 얼굴이 탈락되었으나 중앙에 자리한 이는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인 57세 심사정, 치건을 쓰고 바둑 두는 이가 52세 최북이며, 구석에서 바둑판을 응시한 이가 55세 허필이다.
그림의 포치인 화면 구성은 표암이, 심사정과 최북이 각기 산수와 채색을, 인물은 김홍도가 맡았음을 허필이 화면 상단에 쓴 제
사에 나타나 있다.

고려청자와 고려불화로 대변되는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왕조의 미감美感과 달리, 조선왕조는 검박儉朴을 기저로 해 단순하고 소박하며 맑고 밝은 점에서 구별된다. 선비의 올곧고 반듯한 정신과 마음은 그림만 아니라, 사랑방에 놓인 장식과 꾸밈을 배제하고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에 충실한 목가구와 맑고 투명한 백자 문방구류 등 생활용구에서도 감지된다. 거들먹거림도 없고 비굴함이나 누추함과는 거리가 먼 어질며 익살이 깃든 건강한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이 같은 미감의 중심에는 성리학으로 도야된 선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