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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 - 절충의 산물, 제헌헌법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5-07-06 조회수 : 3392
절충의 산물, 제헌헌법


상당수가 불참한 제헌국회 선거
제헌국회는 사실 반쪽 국회다. 첫 국회의원 선거인 1948년 5· 10 총선에는 48개 정당 및 사회단체와 무소속에서 948명이 출마했지만, 좌파는 물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김구·김규식 등 우파 민족주의 세력도 불참했다. 북한 몫 100석을 남겨둔 채 200석을 놓고 선거가 실시돼, 4·3 사건으로 선거가 무기 연기된 제주의 두 곳을 제외한 198곳에서 의원을 뽑았다.
그렇게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가 54~55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데다, 선거 직후의 29석에서 당원 출신 무소속 의원 등으로 이미 80여 석까지 확보했던 한국민주당(한민당)도 이승만의 대통령 추대를 당연한 일로 전제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이승만은 곧 한민당의 영수이며 한민당은 곧 남한정부”라는 것이 당시 국민들의 일반적 관측이었고, 한민당의 기본인식이었다고 설명한다.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추대된다는 것은 당시 우리 국민들의 상식”(유진산)이라거나 “이 박사를 제외하고는 건국 초의 막중하고 다난한 국사를 강력하게 수행하지 못한다는 정치가와 국민의 공통된 의견이 제헌작업 방향 전환의 배경”(허정)이라는 증언도 있다.




애초엔 내각책임제가 대세
건국헌법에 서명하는 이승만 의장(출처 : 국회)제헌국회의 첫 할 일인 헌법제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의 선택이었다. 이를 놓고 정치적 계산과 명분이 부딪쳤다.
한민당의 선택은 의원내각제였다. 한민당 안에서도 조병옥 등이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했지만, 당론은 의원내각제로 정해졌다. 내각책임제 아래 이승만을 의전적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한민당은 원내 다수세력을 활용해 내각을 장악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6월 3일 구성된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서도 의원내각제와 양원제 지지가 다수였다. 기초위원 30명 가운데 한민당 당적을 지녔거나 한민당계로 분류되는 의원이 10명이었던 데다 다른 기초위원 대다수도 내각제를 지지했다. 공개적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찬성한 기초위원은 허정·이윤영 의원 정도였다. 유진오·윤길중 등 10명의 전문위원들도 헌법이론의 이상대로 내각제 도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유진오가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산하 법전기초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만든 헌법 초안과 신익희 주도의 행정연구회가 1946년 만든 헌법안도 모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유진오와 행정연구회의 최하영·장경근·윤길중·차윤홍·황동준 등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앞서 5월 14일부터 31일까지 공동 연구를 통해 내각책임제를 뼈대로 한 헌법안을 만들었다. 기초위원회가 논의의원안으로 삼은 것도 이 안이다.


‘안정’ 논쟁과 이승만의 고집
이승만은 ‘정부의 안정’을 내세워 당시까지 대세였던 의원내각제에 반격을 가했다. 6월 15일 이승만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해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현 정세에 적합하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은 “적어도 대통령 임기 동안은 정부가 안정된 상태에 있도록 되어야 할 것이고, 국회가 이것을 변경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것이었다. 그는 의원내각제가 “정부의 안정을 곤란하게 할 것이라는 이유로 찬성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촉 소속 의원들도 ‘38선이 있고, 사상과 이념이 혼란하며, 정치적 조직이 미성숙한 건국기의 정치상황에서는 의원내각제가 오히려 정국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주장을 폈다.
헌법기초위원들은 내각제가 국회와 정부의 대립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므로 대통령중심제보다 ‘정치 안정’을 달성하는 데 용이하다고 주장했다. 6월 21일 낮 허정 의원과 유진오·윤길중 전문위원이 이승만을 찾아가 설득하는 자리에서도 유진오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쓰고 있는 중남미 제국에서는 국회와 정부의 대립상태를 합헌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어서 툭하면 쿠데타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국회에 의해 정부가 교체될 수 있는 제도가 대통령의 독재정치에 기인하는 쿠데타나 혁명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기초위원회의 다수 의원들이 내각제를 지지한 것도 “대통령중심제로 하면 전제정치가 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초위원회가 헌법 초안의 국회 상정 직전인 6월 20일까지 의원내각제를 고수하자, 이승만은 6월 21일 제16차 본회의에서 기초위원회 대신 국회 전원위원회로 이 문제를 넘기자고 제안한다. 한민당이 기초위원회에선 영향력을 갖고 있더라도 국회 본회의에서는 저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이 동의안은 찬성 12표, 반대 130표, 무효 2표, 기권 31표로 부결된다.
참혹한 정치적 패배를 당한 이승만은 그날 오후 기초위원회에 출석해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이 헌법 아래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아예 정부에 불참해 반정부 운동을 펴겠다는 ‘정치적 협박’이다. 이렇게 되면 5· 10선거로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단독정부 수립의 정치적 협약이 붕괴되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싸움이 벌어지게 되며 정부의 수립은 물거품이 된다. 한민당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1일 밤 인촌고택의 헌법 수정
이승만이 사회하는 제헌국회 개원식(출처 : 국회)그날 밤, 서울 종로구 계동길 84-6에 있는 한민당 실력자 김성수의 집에는 헌법기초위원장인 서상일을 비롯해 김준연·조헌영 등 한민당 중진들이 모였다. 유진오도 불려왔다. 논의 끝에 동아일보 주필 출신인 김준연 의원이 초안 변경을 맡았다. 10분 만에 만들어진 절충안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되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을 제청·추천하고 국무원(내각)을 합의체 의결기구로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애초 내각제 헌법 원안에 있던 국회 해산권도 삭제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그나마 제약해보려는 것이었다.
대통령제로 바뀐 헌법 초안은 다음날인 6월 22일 기초위원회 의결을 거쳐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본회의의 헌법안 제1독회에서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에 관한 논쟁이 주를 이뤘지만, 2독회에서는 대통령제의 틀 안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제약할 방안이 쟁점이 됐다. 제헌의원들은 대통령 단독이 아닌 국무원의 의결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초안 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대통령과 국무원의 결의가 상충되면 최종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선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했다. 또, 국무총리의 국회 동의 규정은 그대로 뒀지만 국무위원을 국무총리 제천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조항은 삭제해, 대통령에게 국무위원 임명의 전권을 줬다. 내각제론자들은 대통령의 거부권 조항을 삭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를 포함해 본회의 심의과정은 대체로 이승만의 뜻대로 진행됐다. 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되긴 했지만 대체로 강력한 대통령제를 뼈대로 하는 대한민국의 통치구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2독회 후반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수정안은 줄줄이 철회됐다. 8월 15일 해방 세 돌에 맞춰 정부를 수립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공감에 따라, 헌법을 조속히 심의하자는 이승만 의장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다. 7월 12일 제3독회가 열린 제28차 본회의는 회의 시작 두 시간여 만에 기립표결에 의한 만장일치로 헌법을 통과시켰다. 이승만 의장이 서명한 공포문은 ‘단기 4281년 7월 12일에 헌법을 제정한다’고 돼 있다. 제헌절로 정해진 7월 17일은 헌법이 공포, 시행된 날이다.




허물어진 제헌국회 의사당
제헌헌법의 산실인 중앙청은 1995년 8·15 광복 50주년을 맞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결정으로 폭파돼 철거됐다. 1916년 일제가 경복궁 근정전 앞을 가로막고 세워 해방 이전까지는 총독부 청사로,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기 전까지는 정부의 중앙행정관청으로 사용됐던 역사의 자취는 이제 찾을 길이 없다.
헌법 초안이 밤새 바뀐 비사의 현장인 계동 인촌고택은 2·8독립선언이 논의되고 3· 1운동 주역들이 밀회한 곳이기도 하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 글. 여현호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