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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충남 아산(牙山)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아니나 자라나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년 동안 무예 수련을 한 곳이며, 본가가 있어 공의 가족이 살았음은 물론 이 본가를 종가로 하여 대대 종손들이 계속하여 터를 잡고 살아온 지역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매우 총명하고 활달하였다고 전해진다. 동네 아이들과 놀때는 진을 치고 전쟁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때마다 늘 대장이 되었고 아이들이 모두 그의 지휘에 따랐다고 한다. 또 두 형을 따라 서당에도 다녀 글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이웃 마을에 살던 서애 류성룡은 둘째 형 요신과 동갑으로 함께 퇴계의 문하에 있었는데 세 살 아래인 공을 눈여겨 보고 능력을 높이 사 평생 후원하게 되며, 후에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 전라좌수사에 천거하게 된다. 공의 5대조 이변(李邊)은 세종 조 대제학과 1품직인 영중추부사를 지낸 명신(名臣)이고 고조부와 증조부도 벼슬을 지냈으나 조부인 이백록(李百祿)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하다 조정의 핍박을 받았다. 이순신이 태어난 1545년은 4대 사화의 마지막인 을사사화가 일어난 해로 당시는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어서 공의 부친도 솔가하여 처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공은 외가가 있는 아산으로 내려온 후에도 글공부를 계속하였고 21세 때는 이웃마을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혼인하게 된다. 장인인 방진은 보성군수를 지낸 무인으로 사위인 이순신에게 무과를 볼 것을 권유하게 되며 공도 이를 받아들여 붓을 던지고 집 주변에서 활을 쏘고 말을 타는 무예 수련을 하게 된다. 이후 무예 수련 6년 만에 무과에 나갔으나 낙마(落馬)로 실패하고 4년을 더 수련하여 1576년 2월 무과에 급제하게 된다.

급제 후 공은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만호, 건원보 권관, 훈련원 참군, 조산보 만호, 정읍 현감 등을 역임하게 되며 서애의 천거로 1591년 2월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어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군을 조련하는 등 왜란에 대비한다. 이듬해 4월 왜란이 발발하자 5월에 1차 출동하여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5월 말 및 6월 초에는 2차 출동하여 사천, 당포, 당
항포, 율포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7월에는 한산도 및 안골포에서, 그리고 9월에는 부산에서의 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1593년에는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며 1594년에는 당항포에서 다시 크게 이겼다. 1597년에는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하게 된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 이후 다시 통제사가 된 공은 명량에서 이겨 제해권을 되찾아 재기하고, 1598년에는 명 수군 진린과 연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물러가는 왜군과 싸우다 노량에서 순국한다.
현충사의 유래
‘아산 이충무공 유허(遺墟)’인 현충사와 충무공께서 혼인 이후 살던 고택(古宅)과 무예 수련장인 활터 및 조정에서 내린 정려 등은 사적 제155호로, 장군께서 순국한 후 영면(永眠)한 이충무공 묘소는 사적 제112호로 각각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은 최초의 사당인 여수 충민사(忠愍祠)와 통제영(統制營)이 있던 곳에 세워진 통영 충렬사(忠烈祠)와 함께 공이 무예 수련을 하며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량을 키워낸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3대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특히 현충사는 일제시대인 1932년 민족성금
에 의한 중건과 1960년대 성역화를 거치면서 국민들이 가장 많이 즐겨 찾는 명실상부한 이충무공의 대표적 사당이라 할 수 있다. 현충사의 연혁을 대강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이 돌아가신 지 100여 년이 지난 1704년에 충청도 유생들이 조정에 사당 건립을 상소하여 2년 후인 1706년 허락받아 세워졌는데 위치는 지금의 충무교육원 뒷산 기슭이다. 이듬해 1707년에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숙종은 현충사 사액 현판을 내리면서 그 제문에서 하늘이 재앙을 내릴 때는 인물을 함께 내어 망함에서 건져내는 소임을 맡기거니와 공도 이와 같은 경우라고 서두를 뗀 다음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옛날부터 있거니와 제 몸 죽여 나라 살려냄은 이 분에게 처음 본다’고 썼다. 이 ‘신망국활 시견사인(身亡國活 始見斯人)’이라는 글귀는 공을 극찬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1727년에는 공의 조카인 강민공 이완(李莞)을, 그리고 1732년에는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을 추가로 배향하여 매년 춘추향사를 지내었다.
현충사의 중건과 성역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왜정 치하에서 당시 충무공의 13대 종손 이종옥(李種玉)은 가산이 쇠진하였고, 충무공 묘소 임야와 위토(位土)마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소식은 1931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사설 ‘민족적 수치’라는 제하로 보도되었고, 당시 나라 잃은 백성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켜 뜻있는 인사들의 성금이 동아일보로 답지하게 되었다. 약 1년간 이어진 성금은 전국 각지에서 연 2만 명의 인원으로부터 총 16,021원 30전이 모집되었으며, 민족지사 15인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에서는 빚 2,300원을 갚고 남은 금액으로 1932년 6월 5일 새로운 현충사 사당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사당의 현판은 종손이 보관하고 있던 사액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충무공을 위한 성금으로 새로 건립된 만큼 추가 배향된 강민공과 충민공은 제외하고 청전 이상범 화백이 그린 융복좌상(戎服坐像)의 충무공 영정을 모셨다. 위치는 고택에서 가까운 현재의 현충사 건물 바로 아래이며 이것이 두 번째 현충사 사당이다. 해방 후에는 사회적 혼란으로 민족인사들이 좌우익으로 나뉘고 사당 관리가 해이해지면서 종손을 중심으로 한 충무공 종가에서 실질적으로 관리해왔다. 그러다가 1962년 4월 28일 제417회 탄신기념제전에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국가원수로 최초 참석하였으며, 그의 지시로 1966년 시작된 성역화사업에 의해 지금의 현충사가 1967년 5월 24일 건립되었으니 현충사 사당 건물로는 세번째이다. 중건된 사당은 한동안 배전(拜殿)으로 사용하다가 1968년 경내로 이건(移建)하였다.
오늘의 현충사
이순신 기념관은 1960년대에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성역화된 후 설치된 관리사무실과 유물관 등 본래 전통적인 사당 내에 없었던 건물 들을 모두 헐고 외삼문 밖의 교육관과 함께 세 개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현충사의 관리와 충무공 유물의 확대 전시 및 이충무공에 대한 연구와 선양을 위해 2011년에 새로 개관하였다. 새로 개관한 이순신 기념관 내 전시관은 세 개의 큰 전시관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임진왜란 중의 해전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하나는 이순신 장군 개인에 초점을 두고 종가에서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 이충무공의 유물 등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난중일기』와 공의 편지를 모은 서간첩 및 보고서인 『임진장초』가 국보 76호로, 장검, 옥로, 도배, 요대 등이 보물 326호로, 무과급제교지, 증시교지, 증직교지, 기복수직교지, 선무공신교서 등 16점이 보물 15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한 개의 전시관은 영상관으로 노량해전 및 명량해전에 관한 4D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다. 경내의 고택은 충무공의 본가로 대대 종손이 살아온 곳이다. 고택 뒤편에는 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가묘(家廟)가 있는데 매년 음력 11월 19일에 충무공의 기제사를 모시고 있다. 또한, 현충사는 1968년 이후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4월 28일 이충무공탄신기념일에는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 글 송대성 (현충사관리소 기획운영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