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독교계의 활동이 두드러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독교·천도교계의 역할과 함께 국내외 유학생과 각급 학교 및 일반 군중의 자발적 참여는 전남지방 만세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1919년부터 1929년 사이에 전개되었다. 1919년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남궁혁이 귀국하여 박상렬과 함께 활동하다 3월 1일 서울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후 서울유학생 오두근, 김영주의 귀향과 더불어 청년과 학생이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군중의 시위운동에 참여한 정명여고 박금엽의 증언은 정명일백년사(貞明一白年史)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고등과 2년이었던 박금엽은 그 해 21살이었고 당시 약혼한 상태였는데 남편 양병진 씨는 3·1운동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상해로 가고 약혼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만세운동이 있었던 20일 오전 10시경 프렌치병원(양동제일교회 인근) 쪽으로 영흥학교 학생들과 미리 연락해서 시내로 나간다. 당시 유애나 교장은 학생들의 운동을 극려 만류했으나 학생들의 고집을 꺽지 못하였다. 주로 선배들이 앞서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부인복장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시민들에게 배부했다고 한다.

이어 4월 8일과 9일 1,000여 명의 청년과 학생이 대거 참여한 만세운동이 있었다. 목포의 만세시위를 준비한 것은 청년학생층과 양동교회의 신자들이었다. 4월 8일 아침, 이들은 각각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간이상업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을 이끌고 시가지로 쏟아져 나왔다. 약속 시간인 오전 10시가 되자 시내 여기저기서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고 태극기가 나부끼고 격문이 뿌려졌다. 이로써 목포 시가는 삽시간에 사람의 물결로 덮였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목포 4·8만세운동의 특징은 기독교인 청년과 학생의 주도 및 참여가 있었
고 학교별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개 학교와 양동교회에서 오전 10시에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1919년 2월부터 치밀한 사전계획과 준비를 거쳐왔다는 데 있다.
1921년 11월 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군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 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의 외교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목포에서도 11월 14일 정명여학교의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학교로 나와 남교동 방면으로 행진하면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영흥학교 학생 수십 명도 11월 15일 태극기를 흔들면서 교문을 나와 남교동과 죽동 방면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유달산에 올라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하였다. 이 시위로 정명여학교의 천귀례 등 11명과 영흥학교 양일석 등 5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목포에서도 11월 19일 목포상업학교 학생 1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학교 전화 줄을 끊고 격문을 쓴 큰 깃발을 선두에 세웠다. 그리고 자신들을 3대로 나누어 각기 손에 깃발을 들고 격문 수천 매를 살포하면서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치면서 시가지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32명이 구속되어 15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현재 목포에 남아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일본영사관 등을 비롯한 다수의 근대 양식 건축물들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식민정책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반면에 목포시민들이 공동 주체가 되어 자발적 성금 운동을 통해서 지어진 건축물도 남아있다. 목포청년회관이 바로 그것이다. 목포청년회관은 목포청년회 전용 건물로 1925년 4월에 완공되었다. 목포청년회는 1920년 5월에 창립되었으며 청년회관 신축 공사비는 당시 목포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충당했는데 그 금액은 모두 8,000원에 달했다. 목포청년회관은 일제강점기 목포 청년들이 펼쳤던 민족운동의 산실로 192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목포지부 창립식이 1927년 청년회관에서 이루어졌으며, 소작쟁의 등 일제강점기 청년 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1943년, 김기진이 주동하여 <조선청년>이란 잡지를 발행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창간호에 박화성의 「헐어진 청년회관」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렸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문 삭제된 사건도 있었다.

목포청년회관은 특별한 디자인 요소 없이 기능적인 부분을 강조한 근대 건축물이다. 세로로 긴장방형 평면의 단층 석조 건물로 목포 인근에서 채석한 높이와 폭이 30㎝, 길이는 32∼45㎝의 석재를 사용하였고 거친 혹두기를 두어 면이 매우 거칠다. 지붕틀은 한식 3량가 구조로 되어 있고 양 측면에 각각 5개의 수직창이 있으며 그 상하로는 거칠게 마감된 수평 인방을 두었다.
건물 정면 출입구 상부에는 이맛돌을 둔 원형아치가 있다. 건물 자체로 볼 때 크게 주목되는 점이 없어 문화재적 가치를 그리 높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나 이 건물의 가치는 건물의 외형적인 면보다 역사적 의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탄압으로 청년연맹이 해체된 이후 청년회관은 유명무실하게 버려진 공간으로 방치되었다가 2002년 등록문화재 제43호로 등록되었다. 목포시에서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2011년부터 현재까지 남교소극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목포만세운동에 살아 숨쉬는 민족 독립정신을 불어넣던 목포청년회관은 현시대에 시민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거듭나 목포 시민 곁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들은 시대를 넘어 도시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남아 후세가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이정표가 되고 있는 것이다.
- 글 김만수(목포시 문화유산책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