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금으로 수를 놓은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관조복(金冠朝服)의 예를 갖춘 백관과 함께 환구단(圜丘壇)으로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그 시작은 대신들의 주청을 승낙하는 것으로 모양새를 갖췄으나, 주변국인 청(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유럽 국가들과 동등하게 황제국이 되어 국제적으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받고자 했던 고종의 결단이었다. 새로운 황제국의 이름은 고대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큰 한이라는 뜻의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는 광무(光武)라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직전, 1895년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침탈을 넘어서 왕실 신변을 해하는 것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고종은 자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 이에 고종은 황제국을 선포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의 명분이었던 근대화를 직접 추진하여 외세의 침략에 맞서고자 하였다. 고종은 개항 이후 1880년대부터 일관되게 개화정책을 추진해왔었는데, 대한제국 선포 후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고종은 근대적 개혁을 측근세력을 주축으로 강력히 추진하였다. 1899년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권을 강화하고, 제도적 체제를 정비하여 국정 주도권을 확보한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비롯한 황제 직속 기구를 신설하고, 기존의 황실업무 담당기구였던 궁내부(宮內府)와 내장원(內藏院)의 역할을 대폭 확대하여 측근세력의 내실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측근을 중심으로 양전(量田)·지계(地契)사업, 화폐 개혁과 중앙은행의 설립, 전차, 전기사업, 서북철도 부설 등 다양한 근대화사업을 추진하였다. 서구식 교육의 실시,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의 상공업 육성 등 서구의 정책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나아갔다. 대내적으로는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독립문의 건립, 황실 추숭(追崇)과 추존(追尊), 황궁의 대규모 건축사업을 진행하여 황실의 위상을 드높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청국, 벨기에, 덴마크 등과 대등하게 조약을 체결하고, 민간 교류의 만국우편연합(萬國郵便聯合), 적십자사(赤十字社), 박람회(博覽會)와 같은 국제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국제사회에 자주독립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열강의 침략과 급박한 국제 정세의 변화, 국내 정치세력 간의 대립, 자금과 시간의 부족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보호국화(保護國化)를 추진하고 고문관(顧問官)을 파견하여 각종 근대화사업을 중단시키고, 관련기구를 폐지시켰다. 대한제국의 근대적 개혁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화로 변질되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승낙을 얻어 황궁에 건립된 서양식 궁전이다.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궁이었던 덕수궁에는 현존하는 석조전, 정관헌(靜觀軒), 중명전(重眀殿) 외에 순종의 즉위식 연회장이었던 돈덕전(惇德殿), 순종이 태자시절에 거처했던 구성헌(九成軒)을 비롯하여 환벽당(環碧堂), 원수부(元帥府), 망대 등 다수의 서양식 건물이 존재했었다. 이는 서양 문물을 수
용함에 적극적이던 대한제국의 일관된 정책의 결과였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해관의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이 건의하여 건립되었다. 설계는 브라운의 의뢰로 당시 청국 해관의 엔지니어 영국인 하딩(John Reginald Harding)이 맡았다. 1898년 설계도가 완성되고, 목제 모형이 만들어졌으며, 이후 1900년 기초공사가 시작되었다. 1903년~1906년 구조체공사
는 일본 오쿠라도보쿠구미(大倉土木組)가 맡았으며, 1907~1910년 인테리어 공사와 가구 납품은 영국 메이플사(Maple & Co.)에서 시행하였다.
10여 년의 공사를 마치고, 1910년 석조전은 1층은 접견실, 대기실, 만찬실 등의 공적 집무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전통적 개념의 편전(便殿)과 침전(寢殿)을 결합한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황궁의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왕족의 공식행사 및 연회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중인 영친왕(英親王)이 귀국할 때마다 임시숙소로 사용되었다. 영친왕은 1911년 생모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훙거 시, 1918년 육군사관학교 졸업 시, 1919년 고종 국장(國葬) 등 석조전 준공 직후인 1910년대 몇 차례 귀국하였는데, 이때 모두 석조전을 숙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때 석조전에서 많은 사진을 촬영하였는데, 이 사진이 2009년부터 실시한 석조전 복원공사에 중요한 고증자료가 되었다.

석조전 1층은 접견실, 대기실, 만찬실 등의 공적 집무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사적 생활공간으로 전통적 개념의 편전(便殿)과 침전(寢殿)을 결합한 공간으로 완성되었다.
1919년 고종의 국장 이후 덕수궁은 방치되어 도둑과 들짐승이 들끓었다. 이에 일제는 덕수궁의 ‘중앙공원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덕수궁의 여러 건물을 철거하고, 1933년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을 공원으로, 석조전을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조하여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다.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을 대중들의 위락시설로 전락시켜 황실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자 하였다. 이후 석조전은 이왕가미술관,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2009년 석조전 준공 당시 대한제국 황궁의
모습으로 되돌리자는 취지로 문화재청에서 복원공사를 실시하였다. 고증자료를 토대로 5년간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지난해 10월 준공 당시의 생활사를 재현한 공간인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실내는 1910년 석조전 준공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자료를 취합하고 분석하여 공간 구성과 인테리어를 마감하고, 준공 당시 입고되었던 가구를 찾아 배치하였다. 사진이 있는 공간은 고증을 통해 대한제국기 황실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고, 사진이 없는 곳은 대한제국 관련된 주제 전시실로 꾸몄다. 대한제국역사관에서는 황실에 유입된 서양 문화와 서구식 문물의 구체적인 사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서구화를 통한 근대화를 꿈꿨던 대한제국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전시 관람은 1층과 2층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안내해 설사 동반으로 관람 소요시간은 약 45분이다(단, 외국인과 만 65세 이상 어르신의 경우 한 회당 다섯 분에 한하여 현장 접수가 가능하다).
그리고 지층은 시종들이 사용한 공간으로 고증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대한제국을 주제로 전시실을 꾸며, 자유입장 및 자유관람이 가능하다.
- 글 김윤희(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대한제국역사관 큐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