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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름난 의녀들은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관찬사서에는 많은 의녀의 이름이 보인다. 그냥 이름만 나열된 의녀가 있는가 하면 왕의 은총을 받은 의녀도 보이고 특별한 의술을 가진 의녀들도 보인다. 조선시대 의녀들 가운데 이름난 인물들은 누구일까?


대장금은 명실 공히 궁중의 어의녀이자 왕을 돌보는 수의녀였다. 그녀가 한 일은 해산을 돕는 일, 왕실여성의 병을 돌본 일, 왕의 병을 돌보며 대변, 소변의 불통을 진료하는 등 매우 다양하였다. 대장금은 중종 옆에서 간호사 역할 뿐만 아니라 한의사로서의 역할도 했다. 몸이 약했던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오던 풍증과 그에 따른 합병증, 종기 등으로 고생하였는데 자신의 병간호를 대장금에게 맡겼다. 이후 중종의 승하와 함께 대장금에 관한 기록도 사라졌다.
•성종 대 장덕, 귀금, 분이 : 장덕은 성종 때에 유명한 제주도 출신 의녀였다. 그녀는 치통과 충치를 잘 고쳐서 도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눈이나 코 등에 나는 부스럼 제거에도 특별한 능력을 보여 성종이 그를 매우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술을 보급하기 위해 의녀를 붙여 배우게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죽을 무렵에 그 기술을 자신의 여종인 귀금에게 전해 주었다.
귀금도 부스럼을 제거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성종은 귀금이 기술을 숨긴다 하여 의녀로 삼아 그 기술을 널리 전하고자 두 의녀로 하여금 따라다니게 하였다. 귀금은 일곱 살 때부터 이 기술을 배워 열여섯 살 때 완성하였다. 근 10년 동안 의술을 익혔던 것이다.
분이도 황을이라는 의원에게 의술을 배웠는데, 황을은 특히 독에 중독된 병을 잘 다스렸다. 당시 황을은 의술을 숨기고 있다가 세 차례나 형문을 당한 다음에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다. 의녀 분이의 기술도 남달랐으나, 스승인 황을만은 못했던 것 같다.
•선조 대 애종과 선복 : 애종은 선조 때 의술이 특별히 뛰어난 의녀였는데 행실이 바르지 못했던지 선조가 궐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선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방의 강청으로 입진하여 대비를 간호하였다. 이후 애종은 내의녀의 명부에서 삭제되었는데, 그녀가 실제 창녀였는지 음탕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선조는 그녀의 행동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항복은 내의녀들의 대가 끊기게 되었으니 애종을 다시 불러 의녀들을 가르치게 하자고 했다. 애종은 행실은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의술은 매우 인정을 받고 있었다.
선복은 시의녀로 유명하였다. 선조 7년(1574) 윤12월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가 많이 아프자 대비를 간호하였다. 그런데 인순왕후가 승하하자 의관들과 함께 탄핵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공회빈이 아프자 곧 석방되어 그를 진찰하고 간호하였다. 이 의녀들 외에도 조선시대 자료에 이름이 보이는 의녀들은 많다. 연산군은 의녀 강금을 궁중에 불러들여 총애하였고, 영조 때 송월은 침술로 이름을 떨쳤다. 치료의 공으로 상을 받은 의녀들은 매우 많았다 .
의녀들은 의료 행위 외에 어떤 일을 했을까
의녀들은 본업인 의료, 간호활동 외에 여러 가지 잡무에 불려 다니며 시달렸다. 그것은 의녀들이 천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잡무에 종사했을까.

이들을 의기(醫妓) 또는 약방기생이라고 불렀다. 특히 성종 말경부터 의녀들은 기생들처럼 남성들과 어울렸고 연산군 이후 이러한 관행은 더욱 심해졌다.
연산군은 잔치를 열 때 젊은 의녀 수십 명을 뽑아 단장시켜 기녀들과 함께 연회에 참석도록 하였다. 의녀들은 궁궐 안의 연회나 각 관청의 연회, 양반 관료들의 연회 장소에 자주 불려 다녔다. 이에 중종은 의녀들이 연회에 참여하는 것을 법으로 엄하게 금하였으나 이미 한번 흐트러진 풍기는 좀처럼 시정되지 않았다. 여전히 의녀들은 국가의 대소 연회나 양반들의 잔치에 흥을 돋우기 위해 불려 다녔다. 이같이 기녀의 일을 함으로써 약방의녀들을 천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여형사 활동 : 의녀는 요즘 여형사와 같은 일을 하였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수사하고 탐문하는 간심(看審)활동을 하였다. 간심은 수색과 비슷한 일로 의학상의 기초지식을 이용하여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특히 여성과 관련된 구타나 살인사건 등 여성의 몸을 조사하고 여성의 시체를 검시하여 사건 담당기관에 보고하였다. 지금도 경찰서에서나 공항 출국 시 여성은 여경이 몸을 검색하거나 탐지하는 것처럼 남녀유별이 존재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이 여성의 몸을 수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의녀의 수색활동은 사헌부나 의금부의 지휘 하에 행해졌다. 의녀들은 혼인하는 집에 찾아가 사치품이나 부정한 폐물, 예물을 조사하였고, 안방과 같은 여성 공간이나 여성범죄자를 수색하였다. 상궁이나 일반 궁녀들을 체포하거나 수사할 때도 의녀들이 했고, 드문 경우지만 왕실여성이 사약을 받을 경우에도 따라가 죽음의 여부를 확인하였다. 의녀들은 죄인의 체포는 물론 첩보수집과 같은 형사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은 의녀가 의학적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수사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시종(侍從) 역할 : 의녀들은 궁중 여성들과 관련된 여러 일에도 동원되었다. 왕비가 친잠례를 행할 때에 시종을 하였고, 왕실 여성의 상례에도 동원되어 시위하였다. 왕비나 대비의 행차에 의장을 받들거나 의례를 거행하는데 시종하였다. 의녀들은 글을 알았기 때문에 죽은 궁인의 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기녀들에게 글과 시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의녀들은 실력 차이에 따라 실제 활동이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의녀들은 당시 최고의 전문직 여성들이었으며, 의료 활동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일을 수행했던 팔방미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글˚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