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2014.10 의녀는 언제, 왜 탄생했을까?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10-06 조회수 : 5926
조선왕실의 의녀 의녀는 언제, 왜 탄생했을까?

조선시대 의녀의 탄생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구분하는 내외법(內外法)이 의식주 모든 면에 적용되었고 특히 여성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의술 행위에 있어서도 남녀유별을 규정하는 내외법이 지켜졌다. 우리나라 의약의 역사는 수천 년간에 걸쳐 발전해 온 것이지만, 고려시대까지는 여의나 의녀에 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외법이 시행된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여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의녀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의녀들은 당시 최고의 전문직 여성이었다.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러나 양인과 천인, 양반과 상놈의 신분적 차이가 있던 시대에 의녀들은 양반들로부터 상놈으로 차별을 받았다.

남녀유별의 시대에는 의녀가 필요해.
조선을 건국한 지배세력은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하는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고려왕조의 멸망 원인 가운데 하나를 당시 여성들의 풍기문란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자유로운 여성들 대신 성리학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을 만들기 위해 사대부 여성들의 집 밖 출입과 남성 접촉을 어린 나이부터 엄격히 통제하였다. 안과 밖, 여자와 남자의 활동 공간을 엄격히 구분하는 내외법을 통해 집안 내의 정숙하고 조신한 여성을 만들고자 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해(1392)에 대사헌 남재(南在)는 ‘문무양반의 부녀들은 부모, 친형제, 친자매, 친숙부, 친외숙, 친이모 등을 제외하고는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바로 잡자’고 하였다. 남재는 사대부 부녀들이 만날 수 있는 남성의 범주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또한, 지배층들은 부모를 추모하는 법회를 막론하고 당시 여성들의 사찰 왕래를 못하도록 하였다. 부녀자의 사찰출입을 금지한 것은 억불숭유정책의 목적보다도 부녀자들의 실절(失節)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또 여성들이 가끔씩 있는 성대한 국가 행사를 보기 위해 외출을 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남성들과 어깨를 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외법은 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적용되었다. 부인들이 남자 의원이 진찰할 때 수치스러워 자신의 몸을 보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역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남자 의원들이 부인들을 진맥할 때에는 장막을 치거나 문 사이로 손목만을 내미는 모습이 재연되고 있다. 심지어는 부인의 살결에 남자 의원들의 손이 닿는 것을 꺼려 맥을 보는 팔목 위에 엷은 명주 수건을 덮거나 팔목에 실을 매어 문밖에서 맥을 짚는 극단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연 이러한 방법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맥을 짚을 수가 있었을까.

고려사회에서는 별로 문제시되지 않았던 남자 의원들의 여성치료가 조선사회에서는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었다.
 
약장(藥欌): 조선 세로27.4×가로100.5×높이138(cm) 나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의녀의 설치과정은?
태종 6년(1406) 3월에 제생원의 지사로 있던 허도(許衜)가 의녀를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는 양반 여성들이 아파도 자신의 몸을 남자 의원에게 보여주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치료받기를 꺼리며, 그러다가 심지어 죽는 일까지 생겨나니 창고나 궁궐 내 관아의 어린 여자아이 열 명을 골라 맥박과 침, 뜸의 치료법을 가르쳐서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자고 하였다. 여성 직업인으로서 의녀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전에 남의에게 진료를 받아왔던 의료 행위가 사라지고 여성들은 1차적으로 여성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태종에게 의녀 양성을 제안했던 허도는 다시 세종에게 여의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하였다. 교육을 시키는 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안된다. 관아의 여자 종 가운데 10세에서 15세 이하의 총명한 어린 여자 아이를 뽑아서 의녀 교육을 시행하였다. 세종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이지만 여성에 대한 통제를 본격적으로 심화시킨 왕이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교 윤리 서적의 편찬과 보급에 노력하였고,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여 여성의 정절을 더욱 강조하였다. 세종대에 들면서 남녀유별은 더욱 심화되었고, 여성의 치료를 위해 의녀 양성이 본격화되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 중에서 - 의녀들이 얼굴을 가린채 말을 타고 왕비를 수행 하고 있다. [출처:2011년 2월 7일 체결된 프랑스 - 한국 간 합의문 및 프랑스국립도서관과 국립 중앙박물관간 체결된 약정에 따라 귀환한 의궤

의녀가 소속된 의료기관은?
의녀는 소속기관에 따라 크게 혜민서 의녀와 내의원 의녀로 구분되었다. 혜민서는 궐 밖에 있었기 때문에 궐 안에 있는 내의원, 즉 내의사(內醫司)와 구분하여 외의사(外醫司)라 했다. 그래서 내의원에 소속된 의녀를 내의녀라 하였고, 혜민서 소속의 의녀는 외의녀라고 하였다. 혜민서가 서울의 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인데 반해 내의원은 왕을 비롯해 궁궐의 왕실 가족들을 위한 최고의 의료기관이었다. 내의녀가 혜민서 의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났고,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의녀는 관아의 여종 출신
의녀는 신분적으로 최하위계층인 관아의 노비 출신이었다. 당시의 관비(官婢)는 국가재산이며 물건처럼 취급되었다.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금지하는 당시의 이데올로기는 의녀의 선발과정에도 적용되었다. 사대부 여성들은 문밖 활동이 거의 금지된 집안 내의 보호 대상이었던 반면에 노비와 같은 천인은 남녀가 서로 섞여서 일하였다. 당시 집 밖에서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상것들, 즉 천한 여성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녀들은 기본적으로 천인인 여종으로 충당되었다. 이들은 남녀유별, 내외법 등의 이데올로기에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또 관아의 여종들은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필요한 수만큼 선발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국가에서 지정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보내져서 일해야 했다. 능력이나 자질보다 신분이 먼저 고려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 글˚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