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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서울에서 찾아가 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은 도시의 문화자원이자 시민의 휴식처이다. 더욱이 궁궐에는 물리적 형상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조선시대의 역사가 짙게 함축되어 있기에 학습과 교양의 장소가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궁궐은 당대의 본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경복궁의 궐내각사 영역은 수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하면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동궁전 앞쪽과 아미산 뒤쪽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한때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대부분의 모습을 잃었던 창경궁이나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역 자체가 사라지다시피 한 경희궁, 듬성듬성 몇 개의 전각만 남은 덕수궁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조선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창덕궁마저도 화려했던 조선시대 궁궐의 모습 중 일부만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실상 이 다섯 궁궐을 한양의 5대 궁으로 부르며 동시에 존재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조차도 역사의 실체와는 다르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물리적 실체로 존재했으며,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경복궁과 덕수궁이 짧은 시간의 폭만큼만 작동하였다. 그 사이에 인경궁과 같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궁궐도 존재하였다. 말하자면 조선의 여러 궁궐은 서로 치환과 명멸의 복잡한 과정속에 놓여 있었다.

이들 궁궐은 전체적인 배치부터 각 전각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다른 모습이다. 직선 축에 정연하게 배치된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 이후의 궁궐들은 중국적 직선배치 대신 병렬식 배치법을 택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경복궁의 근정전, 사정전은 창덕궁의 인정전, 선정전이나 경희궁의 숭정전, 자정전 등과는 규모와 형태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국가 의례의 공간이어야 했기 때문에 강력한 공통의 규범을 갖고 있다. 정전, 편전, 침전으로 이루어진 조선 궁궐의 전각체계는 어느 궁궐이나 공통적으로 수용한 것이었으며, 그 규모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더라도 동일한 성격의 전각에서는 동일한 방식의 의례가 가능하도록 배려 되었다. 전각 앞쪽의 마당도 마찬가지다. 주요한 전각들은 문과 행각으로 둘러싸인 마당을 갖고 있어 조하, 조참, 상참 등의 조회의식이 가능하게 되어 있다. 전각-행각-문-마당으로 조합된 공통의 공간 단위가 서로 다른 차별적인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각각의 궁궐은 특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궁중 의례라는 견고한 체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체계는 『국조오례의』 등의 법적 규범으로 작동하였다. 이 규범은 조정과 왕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를 규정하고 있었으며, 시간과 공간, 인물과 복식, 음악과 의물 등 모든 항목을 담고 있다.
궁궐은 역사시대의 세계사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천하(중국)’이 세계의 전부에 가까웠던 조선시대의 궁궐은 천자와 제후의 책봉-조공 관계를 통해 주변국과 동일한 시스템 속에 놓여 있었다. 이는 대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나 칼리프 아래의 이슬람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각각의 세계는 견고한 의식 관계의 체계 속에서 존재할 것을 요구받았고, 동아시아의 천하는 그 의식 관계를 궁궐에 투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궁궐의 공간 사용 규범인 의례 체계는 중국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를 들어 천자의 사신이나 외교문서를 맞이하거나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하는 행위 등 제반 의례는 천하의 여러 나라가 공유하고 있었던 체계일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조선 궁궐의 건축이나 궁중 의례가 천자국의 그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천자-제후의 위상을 구분하기 위한 각종 의물과 용어의 차이 등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차별적으로 설정된 것들은 물론이고, 지역마다 달리 발전해왔던 의례에 대한 인식과 건축 기술, 거주 관습의 차이는 궁궐을 조선의 것으로 만드는 요소들이었다. 특히 온돌과 마루를 사용하는 조선적 공간 관습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온돌과 마루는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가진 우리 기후에 알맞게 발전해온 거주의 관습이며 좌식 생활을 주도하는 조건이기도 하였다. 온돌의 사용과 좌식 공간의 관습은 다른 나라의 궁궐과는 다른 침전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가운데에 전면 3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을 배치한 조선 궁궐의 침전은 가장 독특한 전각 유형이다. 거기에 온돌에 수반되는 굴뚝을 궁궐의 의장적 요소로 활용하는 것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평가받을 만하다.
지형도 그러하다. 본질적으로 평지의 광활한 대지를 대상으로 형성된 중화문명권의 궁궐 규범은 한양과 같은 경사지형의 도시에 그대로 적용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은 서로 다른 조건의 경사지형을 독창적으로 풀어낸 수작들이다. 특히 경희궁은 가장 급한 경사지이면서도 궁궐의 면적이 좁아 당대의 건축가에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은 궁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의 높은 대지에 숭정전과 자정전을 놓고, 그 동쪽 아래 비교적 평탄한 땅에 침전과 동궁전을 배치하여 두 영역을 경사진 복도각으로 연결한 수법은 그 고민의 해법이었다. 지금은 시가지 일부가 된 동쪽 영역에는 광명전, 장락전 등의 전각이 늘어서 있었다.

위로 천자국과의 위계적 구분이 중요하였다면, 아래로는 민간의 집들과 달라야 하는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이 궁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차별적 의례, 즉 국가의례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국가의례를 안정적으로 설행하기 위한 공간적 장치로서의 궁궐은 중첩된 대규모의 마당, 여러 겹의 문과 마당을 둘러싸는 행각, 월대, 각종 장식의장 등에 의해 민간의 공간과는 다른 위엄을 내보였다. 궁궐은 당대의 건축기술이 집약된 수준 높은 물리적 대상이다. 세부적 기법 하나하나에 들여진 공력은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에 서로 다른 성격의 수많은 의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칸막이 벽이나 휘장, 보계 등 임시적인 시설을 함께 활용함으로써 용도에 맞는 변용을 이루어낸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현대인으로서 조선시대의 궁궐을 둘러보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당시의 감각, 궁궐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 의례라는 견고한 틀, 건축역사학적 지식 등이다. 여러 궁궐 사이에 놓여 있는 보편적 동질성과 차별적 해법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예민한 눈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궁궐은 충분히 즐거운 장소이다. 옛 사람의 기분으로 궁궐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만 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많다.
약간의 초점이 필요하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일 수 있다. 경복궁이라면 강녕전 뒤, 아미산, 자경전 뒤 등 곳곳에 숨겨진 굴뚝을 찾아보면서 궁궐의 엄격한 배치 속에 숨어있는 유희의 감각들을 살펴보는 것을 추천할만하다. 창덕궁에서는 인정전 뒤나 낙선재, 혹은 후원에서 건축과 자연이 어떻게 어우러지고 있는지를 느끼는 것과 인정전-선정전-희정당-대조전으로 이어지는 병렬된 전각들 사이를 임금이 어떻게 다녔을 지를 상상하는 것이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성종 대에 삼대비전을 모시기 위해 지어낸 창경궁에서는 동쪽을 향한 명정전 뒷면의 빈양문과 행각, 함인정-경춘전-환경전 등 대비전 영역이 가장 좋은 중심의 평지를 차지하고 있는 특징, 통명전 옆의 연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경희궁에서는 직선의 규범적 배치를 경사 지형에 풀어낸 감각을 추적해보는 것이 좋겠고, 덕수궁에서는 근대의 거친 바람 속에서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각국 공사관과 고종의 궁궐이 얽혀있는 도시적 감각을 느끼는 것, 그리고 석조전, 중명전 등 양관으로 만들어진 궁궐 전각에서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요점은, 궁궐은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생활하고 일하던 곳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궁궐은 동아시아적 규범과 왕실의 일상적 욕구가 뒤얽힌, 그야말로 가장 두껍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지 않은가!
- 글 조재모 (경북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