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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을 표현하다 (조선의 화장문화)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12-31 조회수 : 5055

 

지난해, 조선 시대 왕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있다. 그 첫 장면이 상투를 틀고 수염을 다듬으며 단장하는 왕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던가[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 심지어는 최근 개봉한 영화 속 여배우의 한복을 언급한 기사에서도 사진 속 여배우 아래 놓여 있던 몇 점의 화장용기가 옷보다 먼저 눈에 띄었다. 요사이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에는 유독 화장과 관련된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영상 속 여배우를 언제나 바느질을 하는 모습으로 그리던 과거와 달리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모습이 자주 비쳐 화장문화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그 영상들을 일일이 찾아보느라 바빠졌다. 그렇다면 매번 화려한 영상으로 등장하는 조선 시대의 화장문화는 실제로 어땠을까? 화려했던 고려의 화장문화와 달리 조선의 화장문화는 이전 시기보다 담박했다. 사치와 퇴폐풍조가 퍼졌던 고려에 대한 반작용으로 국가에서는 실리와 검약을 강조했고, 사치스러운 옷차림을 금지하고 장신구 착용에 제한을 두기도 했다.또한, 조선의 통치이념이자 사회규범의 기준이었던 유교 윤리는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여성들에게 화려한 외모보다 부덕(婦德)과 부용(婦容)을 강요했다.

 

외모를 꾸미기보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대부 여성들은 특별한 나들이 때나 손님을 맞을 때만 엷은 색조의 은은하고 수수한 화장을 했고, 복숭아색의 분을 사용하여 흰 분을 사용하는 기생과 차이를 두고자 했다. 조선 역시 기생·궁녀와 같은 직업여성은 여염집 아녀자와 달리 흰 얼굴과 진한 눈썹, 붉은 연지를 바르는 좀 더 진한 화장을 했다. 그러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1763)에 ‘후세 부인들은 모두 얼굴에는 붉은 연지를 찍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낀다’는 기록과 조선 여성들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빙허각이씨(憑虛閣李氏)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09)에 여러 가지 화장품 제조법, 연지와 눈썹에 대한 묘사, 모발을 길면서 검고 윤기나게 하는 법 등의 화장법이 수록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선 여성들이 몸단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남성들도 여성 못지않게 외모를 가꾸는 데 공을 들였다.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단장을 했다면, 남성들의 단장은 예(禮)를 갖춘 선비가 되기 위함이었다. 단정한 몸가짐을 위해 선비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거울을 들어 머리를 정리하고 세수를 했다.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기 때문에 항상 의관(衣冠)이 바르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조선 사람들이 사용한 화장품과 화장도구들을 알고 싶다면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의《여용국전(女容國傳)》을 추천한다. 책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치세에 힘쓰면 나라가 태평하지만 안일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화장에 빗대 화장품과 화장도구를 의인화하여 풍자한 내용이다. 이야기를 통해 조선 후기의 화장관념, 화장품과 화장도구의 종류를 알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조선 시대에는 화장품을 대부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구매해 쓰는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당시의 시장인 육의전(六矣廛)에는 화장용품을 파는 분전(粉廛)이 있었고, 숙종 연간에는 화장품 행상인 매분구(賣粉嫗)가 집집이 돌아다니며 방문판매를 했다는 기록으로 말미암아 화장품 산업이 발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조선 후기 시장의 모습과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그린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는 화장문화와 관련된 재미난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화장품을 앞에 놓고 화장하는 여인들의 모습과 장신구, 빗, 거울 등을 파는 상점도 있다. 특히, 거울가게를 방문한 손님들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과 그들이 동경(銅鏡)이 아닌 유리거울을 살펴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유리거울은 조선 후기 중국과 러시아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기존의 구리로 만든 거울과 달리 가볍고 얼굴도 깨끗하게 비춰주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가거나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귀국길에는 거울을 가져오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거울과 함께 중국에서 다량 들어온 것이 백자청화(白磁靑畵)이다. 조선은 이미 고려로부터 전해진 도자기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백자(白磁)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청화 물감과 화려하게 장식된 백자청화는 조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점차 백자청화의 수요를 높였다. 더불어 청화로 장식한 백자청화 화장용기를 찾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화장용기는 대부분 여성이 사용하기 좋게 한 손에 쏙 들어갈 만큼 작아서 경대나 빗접에 넣어 보관했다. 화장용기의 종류도 다양해져 삼국과 고려 때 많았던 유병(油甁)과 분항아리[粉壺], 분합(分合)은 물론, 분접시(粉楪匙)와 분수기(粉水器)도 있었다. 특히 분접시는 화장품을 갤 때 사용했으며, 분수기는 물을 담아놓고 필요한 만큼 덜 때 사용했다. 위의 내용으로 비추어볼 때 조선 시대에는 사회적 제약과 규범에도 불구하고 화장문화가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지던 화장품 유통이 점차 산업화하여 발전해 가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화장문화는 점차 근대적 방식으로 변화해 나갔고, 신식 화장법과 화장품이 등장하는 시대를 맞게 된다.

 

글˚이지선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