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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 정조가 할아버지와 함께 읽은 『대학』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12-30 조회수 : 3145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조에게는 두 살 터울의 형 의소세손이 있었지만 그는 정조가 태어나기 6개월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맏손자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왕실의 가족들에게 정조의 탄생은 큰 기쁨을 주었다. 정조는 태어난 당일에 원손(元孫)으로 정해졌고 7세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다. 이보다 앞서 사도세자와 의소세손이 2세 때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된 것을 고려하면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되는 시기는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정조는 1762년에 11세의 나이로 동궁(東宮)에 책봉되었다. 같은 해 윤 5월에 동궁으로 있던 사도세자가 목숨을 잃으면서 정조가 왕위 계승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조는 24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실시했고 이듬해 영조가 사망하면서 조선의 22대 국왕이 되었다. 정조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나타났다.

 

정조는 첫돌을 맞을 때 책을 펴서 읽는 시늉을 했고, 4세 때부터 『소학』을 간추린 서적을 배우기 시작했다. 손자의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것을 본 영조는 5세 때 특별히 사부를 임명하여 『동몽선습』을 가르치게했고, 왕세손으로 책봉한 다음에는 강서원을 설치하여 교육을 전담하게 했다. 동궁 시절에 정조는 시강원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이 무렵 정조는 유교 경전을 차례로 독파하면서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았고 한번 읽었던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훗날 정조의 행장을 작성한 이만수는 ‘왕(정조)은 15년간 동궁으로 있으면서 어른의 침실에 문안을 올리거나 제사 음식을 살피는 것이 아니면 경전 공부에 마음을 쏟아 매일같이 부지런히 했다. 성리학의 원리와 학문하는 방법, 옛 성인들이 서로 전수한 비결과 과거 현자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심오한 이치까지도 연구하여 찾아내지 못한 것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정조에게 최고의 스승은 할아버지 영조였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 나오는 내용은 강서원이나 시강원에 소속된 관리들이 가르칠 수 있었지만 국왕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지식은 국왕인 영조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유일한 손자이자 왕위 계승자인 정조의 교육을 직접 주관했다. 영조는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한 후 『소학』의 16구절을 써주면서 『소학』의 학습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이후 영조는 경연 자리에 손자를 불러 함께 자주 학문을 토론했고, 정조를 동궁으로 책봉한 이후에는 학습 강도를 더욱 높였다. 영조는 정조를 동궁으로 책봉하던 해에 고위 대신들이 모두 입시한 자리에 왕세손을 불러와 『대학』을 읽게 하고, 국가에 국왕이 있는 이유와 역대의 국왕 가운데 군사(君師)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영조의 제왕학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또한 영조는 동궁의 대리청정을 결심하던 자리에서 『어제자성편』과 『경세문답』을 동궁에게 가르쳐 자신의 사업과 심법(心法)을 알게 하라고 명령했다.

 

자신이 직접 편찬한 제왕학 교재를 가지고 손자를 가르치겠다는 의도였다. 훗날 정조가 편찬한 『일성록』은 영조의 『어제자성편』을 모범으로 한 책이었다. 『어제조손동강대학문(御製祖孫同講大學文)』은 1775년 12월 27일 경희궁 집경당에서 개최된 경연에서 영조와 정조가 『대학』을 함께 강의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이날 영조는 『대학』의 경 1장을 외운 다음 정조에게 『대학』 본문을 읽게 했고, 다시 주자가 작성한 보망장(補亡章)을 외웠다. 다음으로 영조가 질문하고 정조가 대답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대학』을 덕(德)에 들어가는 문이라 하는데 이는 무엇인가?” “『대학』에는 격물치지에서 치국평천하까지 각각의 단계가 있는데 이를 문에 비유한 것입니다.” “『대학』의 도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학』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물욕(物慾)을 깨끗이 한 후에야 실천 할 수 있습니다.”

 

“물욕은 어째서 없애기 어려운가?” “물욕은 형기(形氣)에서 나오므로 없애기 어렵습니다.” “네가 이 뜻을 본받지 않으면 이는 나를 등지는 것이요, 조정을 등지는 것이며 하늘을 등지는 것이다. 나라의 흥망과 백성들의 안위가 너 한 몸에 달려 있으니 어찌 마음에 두지 않겠는가.” 이때 할아버지 영조는 83세의 노인이었고 대리청정을 하던 손자 정조는 24세의 청년이었다. 영조는 3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의 운명이 정조 한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누차 강조하면서 정조가 격물과 치지에 정성을 다해 사물을 제대로 판단하는 경지에 이르면 국가는 태산과 반석처럼 굳건해지고 할아버지에게는 효도를 다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영조로서는 가장 절실한 염원이 담긴 가르침이었다.

 

글˚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