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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6월 - 천왕문(天王門)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12-26 조회수 : 3409

 

종교는 사회를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사회 변화는 새로운 종교의 태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삼국시대 이후 한국 문화의 결정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시작도 다르지 않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쓴 ‘문화의 수수께끼’가 지금도 대학생 필독서인지 모르겠다. 해리스는 이 책의 관심을 먹거리로 심화시킨 또 하나의 저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불교의 출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힌두교는 소를 숭배하는 종교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과거 힌두교의 베다경전은 소고기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부 인도에서 소고기는 가장 흔한 육류였다. 그런데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경작지가 넓어지고 숲과 초지는 줄면서, 소고기는 비싼 식품이 되었다. 기원전 600년 무렵 전쟁과 가뭄으로 기근이 심각해졌고, 사람들은 최상위 계급만 소고기를 먹는 불평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누어 먹을 수 없는 구조에서 공평한 해결책은 모두가 먹지 않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게다가 소는 이제 먹는데 보다는 밭을 가는데 써야 했다. 이런 사회적 여건에서 살생을 금하는 종교인 불교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힌두교가 소를 숭배하는 종교가 된 것은 불교와 경쟁해 지지자를 되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결과였다는 것이 해리스의 주장이다.


문화란 사회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못하면 쇠퇴하는 생물(生物)이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하는 종교는 더욱더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인도에서 태어난 불교 역시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 전해지면서 현지 풍토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한 지역에 뿌리내렸다 해도 살아남으려면 그 지역 사회의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인도와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가 적잖은 차이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 불교가 삼국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쉼 없는 사회화의 결과다. 불교는 이른바 숭유억불 정책으로 곤경에 처했던 조선시대조차 적절한 사회적 대응을 넘어선 뛰어난 돌파력을 보여주었다. 초기 불교가 목축사회에서 농업사회로 탈바꿈하는 인도의 사회적 변화에서 그 성립의 실마리를 잡았듯, 불교는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자신들이 처한 존립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았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호국 활동을 펼치며 입지를 넓힐 수 있는 명분을 쌓았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왜란이 일어나자 수행자들은 승군을 조직해 싸웠다.

 

호란을 앞두고 수도를 방어하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쌓고 지킨 것도 이들이었다. 구례 화엄사의 사례를 보면 불교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국난 극복에 앞장섰는지를 알 수 있다. 왜란 당시 화엄사는 승군의 주둔지이자 훈련장이었다. 이 절 출신의 윤눌은 승병을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의 수군에 가담했고, 해안은 진주성 싸움에 참여했으며, 주지 설홍은 구례 석지진을 끝까지 지키다 순국했다. 화엄사는 왜군의 손에 전소됐다. 게다가 당시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교는 현실철학이라는 한계로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백성을 보듬을 방법이 없었다. 고통을 위로하고 죽은 이를 극락왕생케 하는 불교는 사실상 민심을 아우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되자, 왕실도 불교에 일정한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신적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승군대장이었던 부휴당 선수(1543~1615)가 지은 ‘난리에 죽은 영혼을 천도하는 글(薦戰死亡靈疎)’을 보면 왕실이 직접 불교에 천도재를 열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임금은 수레를 타고 파천하시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송장은 쓰러져 도랑과 골짜기를 메우고 피는 흘러 도성에 넘칩니다. 하늘이 높이 백성의 죄 없음을 불쌍히 여겼으니 임금의 말씀이 산림(山林)에 내려져 뼈를 주워 들에 묻고 재를 베풀어 천도를 지냈습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정의 사대부들이라도 불교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불교는 중흥의 전기를 맞았다. 민심의 의존도는 더욱 커졌고, 왕실과 조정의 제약도 크게 감소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전국 각지에서는 불사(佛事)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찰의 모습을 전란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규모를 전보다 훨씬 키우는 대대적인 불사도 적지 않았다. 당시 급격히 강화된 불교의 위상은 오늘날 우리가 추측하는 것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양난(兩亂)은 불교 신앙의 모습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사찰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변화는 괘불(掛佛)의 등장과 천왕문(天王門)의 유행이다. 괘불은 불교 종교적 기능을 확대·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천왕문을 불타버린 사찰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지은 데는 왕실과 조정을 겨냥한 중요한 정치적 의도를 엿보게 한다. 불교의 호국정신과 국난극복 과정의 헌신을 기억하라는 일종의 ‘정치적 기념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괘불은 야외 법회에 쓰이는 대형 불화를 말한다. 글자 그대로 ‘거는 불화’다. 경북 영천 은해사 괘불은 높이가 15m, 너비가 6.07m에 이른다. 보은 법주사, 상주 북장사, 하동 쌍계사 것도 13m가 넘는다. 불화가 커진 것은 불행의 크기가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다. 두 차례 난리로 조선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줄어든 상황이었다. 천도재가 열리는 날이면 법당 내부는 물론 절 마당까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야외 법회에도 대웅전의 후불탱을 들고 나갔겠지만, 곧 대안을 마련한다. 그것이 넓은 마당에 매다는 대형 불화였다. 괘불은 신앙의 양상과 절마당의 모습을 바꾸어놓았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토속신앙에서 유래한 존재이지만, 불교에 편입되면서 부처를 호위하고,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천왕은 세상의 중심이라는 수미산 중턱에서 각각 자신들의 권속을 거느리고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각각 맡아 지킨다. 동쪽의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이다. 사찰을 호위하는 역할이니 천왕문은 절의 들머리에 세워졌다. 사천왕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부각된 존재는 아니다. 사천왕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신라시대에는 경주 사천왕사터의 소조 사천왕이나 감은사터 석탑의 사리장엄 같은 소규모 조각상이나 불탑에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도 석탑·석등이나 구리거울에 조각한 경상(鏡像)에 보일 뿐이다. 조선 후기처럼 천왕문의 형태로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은 유례가 없다. 학계에서는 고려시대에 천왕문이 지어지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남아 있는 고려시대 천왕문은 물론 뚜렷한 흔적도 없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과 이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은 전국 17곳에 남아 있다. 조선 전기 것은 제 모습을 유지한 것이 없다. 조선 후기 사천왕상도 양난 이전 것은 둘뿐이다. 장흥 보림사가 1515년, 김천 직지사가 1596년 이전 조성했다. 법주사는 1624년, 순천 송광사는 1628년, 화엄사는 1632년, 완주 송광사는 1649년 이전 각각 사천왕상과 천왕문을 조성했다. 이후 고흥 능가사와 홍천 수타사, 고창 선운사, 청도 적천사, 남해 용문사, 하동 쌍계사, 양산 통도사, 안성 칠장사, 서울 봉은사, 여수 흥국사, 영광 불갑사에도 천왕문이 잇따라 세워졌다. 조선 후기 천왕문이 새로 지어진 사찰 가운데 승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이 9곳이고,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절이 3곳이었다고 한다. 부휴당 선수와 그의 제자로 역시 승군을 이끌었던 벽암 각성(1575~1660)을 비롯한 문도들이 천왕문의 건립을 주도했다. 천왕문과 내부에 모신 사천왕은 불교가 자신들의 호국정신을 왕실과 조정에 보여주는 무언의 상징물이었다. 천왕문과 사천왕은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불교가 이 나라에 존재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파하는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 이후 한국 불교의 DNA에 쌓인 탁월한 정치적 감각은 잇따른 천왕문의 건립에서도 읽을 수 있다. 천왕문이라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겨놓은 것은 그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산물이다.

 

글˚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