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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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기」에서는 국가유산을 더 잘 즐길 수 있는 역사와 관련된 지식들을 전달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시간, 공간, 전쟁, 대외교류 등에 대해 소개합니다.
국가유산과 시간



  한국사에 등장하는 첫 국가는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입니다. 원래 나라 이름은 조선이지만 뒤에 생겨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날의 의미를 담은 ‘고(古)’를 붙여서 고조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와 관련해서는 기원전 2333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연대는 나중에 한국에서 단군 기원, 곧 ‘단기’ 연호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근대, 그리고 현대의 일부 한국사 기록에 4000으로 시작하는 연대는 이러한 단기입니다. 

  고조선은 중국 한나라의 공격으로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습니다. 이 시기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한민족의 여러 국가가 생겼습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부여와 고구려, 동예, 옥저와 같은 나라가 있었으며 한반도 중부, 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에 속하는 수십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들은 고구려와 부여로, 마한의 여러 나라에서 백제로, 진한의 여러 나라에서 신라로, 변한의 여러 나라에서 가야 여러 나라로 통합되어 갔습니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던 시기를 보통은 ‘삼국시대’라 부릅니다. 그 배경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러나 부여는 5세기, 가야는 6세기까지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7세기에 들어서면서 대륙의 국제정세 변화와삼국 사이의 경쟁이 심해졌습니다.이러한 상황에서 삼국 가운데 가장 약한 나라였던 신라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친 끝에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후 신라는 옛 백제 영역 전체, 그리고 고구려 영역 일부를 차지했는데요, 보통 ‘통일신라’로 부르며,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북쪽의 발해와 함께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략 7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의 시기가 이에 해당됩니다.

  10세기에 이르러서는 남북국시대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먼저 신라에서는 중앙에 반발하는 호족을 중심으로 후백제(900)와 후고구려(901)가 건국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신라와 함께 세 나라가 다시 경쟁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 시기를 후삼국시대라고 합니다. 후삼국시대는 30여 년의 짧은 시기지만, 남북국시대에서 고려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후삼국 가운데 하나인 후고구려는 마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었는데,내부 정치적 변동에서 왕건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때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했는데, 이는 918년의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후백제, 신라와 경쟁해야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쳤고, 936년에 후백제도 고려에 항복하면서 후삼국시대는 고려로 통일되었습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했고이 과정에서 많은 발해의 유민이 고려에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고려는 유연한 외교,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안정을 유지했으나 고구려 계승을 목표로 북진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전쟁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고려가 대규모로 벌인 첫 전쟁은 993년부터1019년까지 이어진 거란,
곧 요나라의 3차에 걸친 침입이었습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마지막 전투에서 고려가 귀주대첩을 통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 고려는 요나라와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고려 동북 지역의 여진족이 고려 국경을 침입하자 대규모 군사인 별무반을 편성해 여진족을 정벌하고 9개의 성을 쌓았습니다. 1107년경의 일입니다.
그러나 여진족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고려에서도 이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동북 9성을 반환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강한 군사력을 알고 있던 여진족은 이후 금나라를 세운 뒤 고려에는 외교적인 공세만을 취할 뿐 침략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외교를 바탕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고려는 다시 100여 년 뒤,
이번에는 몽골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당시 고려는 무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차지한 상태였습니다. 무신정권은 몽골에 항쟁하기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였고 39년간 몽골에 대한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는 몽골과 강화하였고,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속국이 되는 것은 피했으나 80여 년 간의 몽골 간섭기에 들어갔습니다.
또 제주도를 비롯해 동북지역과 서북지역의 일부 영토를 상실했습니다.

  고려 말, 원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반원자주정책을 펼치면서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또 상실했던 국토도 회복했으나 이번에는 왜구,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혼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신진사대부가 당시 유능한 장군이었었던 이성계와 손을 잡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으니 이 국가가 바로 조선입니다. 1392년 건국한 조선은 건국 직후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조선은 성리학, 곧 유교를 나라의 이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고려의 문화와 큰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도읍지 개성에는 많은 절이 있었으며 궁 안에도 절이 있었으나
한양에서는 건국 초기를 제외하고는 절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 종묘와 사직, 성균관과 향교와 같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건축물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은 200년 동안 전쟁이 없는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 일어난 일본군의 침입, 곧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을 겪으며 나라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한양의 궁궐도 모두 불에 탔습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국가유산 가운데 임진왜란 전의 국가유산이 아주 귀한 유산으로 평가받게 된 배경입니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복구되기 전,
이번에는 북방에 새롭게 강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병자호란(1636)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났으나 조선의 왕이 항복을 했다는 점에서 조선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으며, 청나라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라 밖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사이
1866년,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입인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군의 강화도 침입인 신미양요를 겪었고 1876년에는 일본의 압박 속에서 강화도조약을 맺으며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했습니다.
1882년에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고 이후 서양의 여러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이후 적극적인 변화를 모색한 조선은 청나라의 압박, 일본의 계획적인 침략 속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특히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며 새로운 국가로 나아갈 동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다시 변화를 모색한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뤄지면서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 등 여러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1919년 3월 1일 시작한 만세 시위를 기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으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1948년 8월 15일에 한반도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한반도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곧 북한이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 큰 상처를 주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고, 그 모습은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가유산과 공간



  한국의 행정구역은 한국사의 영향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어 각 지역을 가리키는 광역자치단체인 ‘도’는 그 지역의 유래가 깊은 도시 두 곳의 앞 글자로 만든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의 앞 글자로 만든 이름입니다.
다만 경기도는 ‘기(畿)’라는 한자가 서울을 둘러싼 지역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서울을 둘러싼 지역’이라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조선 후기 이 ‘도’를 남북으로 나누며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를 제외하고 남도와 북도, 예를 들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전라도에 속하던 제주도는 별도로 독립했습니다.
최근에 제주도와 강원도, 전라북도는 ‘특별자치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명칭은 ‘강원특별자치도’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인은 강원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북한지역도 이러한 원칙의 지명이었으나 나중에 북한 정부가 자강도와 양강도 같은 행정구역을 추가하면서 조금 달라졌습니다. 

  한국의 지명은 한글 이름이 있다고 해도 한자를 쓰던 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대체로 한자로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일하게 한자로 이름을 적을 수 없는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서울입니다. 원래 서울은 어떤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 수도를 가리키는 낱말이었습니다. 한양, 한성부로 불렀던 서울은 조선시대 내내 수도였다는 점에서 서울로도 같이 썼는데 광복 이후
이 이름을 도시의 이름으로 정한 것입니다.

  이 밖에 한국에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영남이나 호남, 영동이나 영서란 이름입니다. 영남은 현재의 경상남북도 일대를 가리키는데요, 영은 고개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곧 백두대간 가운데 위치한 큰 고개인 문경새재를 가리키니, 영남은 이 고개 남쪽을 뜻하는 말입니다. 호남은 호수의 남쪽이란 뜻입니다.
예전에 금강을 금호로 불렀던 것과 관련해 생겨난 이름으로 금강 남쪽, 곧 지금의 전라도 일대를 가리킵니다. 영동과 영서의 기준은 대관령이 되는데요,
대관령의 동쪽으로 바닷가 지역이 영동, 대관령의 서쪽 내륙 지역을 영서로 부르고 있습니다.


국가유산과 전쟁



  한국의 국가유산은 전쟁의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국가유산의 피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국가유산과 관련하여 역사 속 전쟁을 이해하는 것은 국가유산의 가치를 파악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유산에 피해를 준 대표적인 전쟁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해지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던 전쟁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근대에는 나라의 도읍지에 국가유산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도읍지의 함락, 그리고 나라의 멸망에 이르는 전쟁은 국가유산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으로 이끌었던 왕검성 전투가 있습니다. 또 660년, 백제의 멸망을 재촉한 사비성 전투.
그리고 668년,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 있었던 평양성 전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구려나 백제의 국가유산 가운데에는 화재의 피해가 덜한 석조 건축물인 탑과 같은 문화유산, 그리고 비록 도굴당했다고는 하지만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고분 정도의 국가유산을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이와 달리 고려에 항복하면서 직접적으로 경주에 피해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기 몽골이 침입했던 1238년, 경주 일대의 건축물이 모두 불에 타는 참화를 겪었습니다. 이때 유명한 황룡사 목탑과 장육존상 등 경주에 위치하고 있던 국가유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상도 일대에 피해가 이어지면서 이전에 제작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던 <대장경>이 불에 탔으며, 이를 다시 제작한 대장경이 널리 알려진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입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에서, 혹은 왜구의 침입으로 국가유산의 피해가 이어졌으나 조선 중기 있었던 임진왜란 정도의 피해를 준 전쟁은 드문 편입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이어진 7년 전쟁은 한반도 대부분을 전쟁터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의 궁궐과 종묘 등 주요 건축물이 모두 불에 탔으며
여러 지역의 향교와 사찰도 소실되었습니다. 또 많은 도공이 일본군에게 잡혀가면서 조선에서는 분청사기 제작의 전통이 끊길 정도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국가유산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 전쟁은 6.25전쟁입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진행된 3년 전쟁은 그나마 남아있던 국가유산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던 문화유산 상당수는 부산으로 옮겨서 안전하게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직후 일어난 화재로 인해 부산에서 보관하던 궁중의 유물,
대표적으로 임금님의 초상화인 어진 대부분이 소실되는 사선을 겪었습니다. 또 절이 전쟁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불에 타거나 훼손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국가유산은 이러한 전쟁의 참화를 피한 귀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해인사에 보관하고 있는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은 몽골과 전쟁 중에 만들었는데요,
몽골과 전쟁,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그리고 6.25 전쟁이란 국가적 재난을 피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력을 알고 보면 한국의 국가유산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국가유산과 대외교류



  대외교류는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 그리고 국가유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조선 때 이미 중국에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이미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외국과 교류에 나섰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불교 전래 기록은 교류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고분의 벽화나 유물을 통해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씨름하는 사람, 그리고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경주의 무덤 앞 석인상을 보면 서역과 교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백제의 무령왕릉은 중국의 남조, 일본과 교류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가야의 고분군, 나주 일대 마한의 고분군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래한 유물이 있다는 점에서 교류의 폭이 넓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역시 예성강 하구 벽란정을 통해 여러 나라에 교류를 했습니다. 이 시기 고려의 이름KOREA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몽골 간섭기에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베이징에 머물 때 고려의 신하들도 함께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건국한 조선은 초기에 주변 여러 나라와 적극적으로 교류했습니다. 중국에 새롭게 등장한 명나라를 비롯해 일본, 유구국(오키나와), 여진족 등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조선은 공식적으로 청나라와 일본과만 교류하며 교류의 폭이 좁아졌습니다. 한편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새롭게 서양의 문물이 전해지기도 하였는데요,
망원경, 자명종, 그리고 <곤여만국전도>란 세계지도 등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개항한 이후 본격적으로 세계와 교류를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