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에세이



프롤로그 / 하늘을 지붕 삼아 떠도는 나그네처럼

  여행의 좋은 점이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나는 그중 최고는 역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나마 ‘생존 경쟁의 제약에서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 계획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살아가는 데에 무척이나 필요한 자세이다. 그러나 나는 종종 머릿속이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는 것에 체증을 느낄 때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입에서 현실적인 말들만 나오는 게 무섭다. 이런저런 복잡한 숫자들을 너무 자주 보고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래서 그럴 때는 멀리 깊은 자연 속으로 떠난다. 최대한 속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는 그렇게 아득히 비현실적인 자연의 풍경 앞에서 하염없이 뭉그러지는 순간이 좋다. 어느새 거듭 다짐하게 된다. ‘어딘가 붙들려 매여 있다 생각하고 살지 말아야지.’ ‘나 스스로 작은 것에 구속하며 살지도 말아야지.’
아마도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은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홀한 풍경은 그것 자체로도 사람 정신의 얼룩진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므로.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강원도 ‘관동 풍류의 길’이다. 빼어난 경치로 유명한 관동 지방은 예로부터 당대의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찾던 곳이다. 그래서 나도 이번 여정은 풍류의 정신을 생각하며 여행하기로 했다. 다시 말해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 멋을 아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람과 물이 흐르듯 유유자적 즐기는 것. 그런 다짐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관동은 대관령의 동쪽을 가리킨다. 그러니 대관령은 관동 풍류의 길을 여는 길목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신사임당은 강릉에 계신 모친을 그리며 어린 율곡과 대관령옛길을 건넜고, 관동팔경을 화폭에 담은 김홍도 역시 붓을 들고 대관령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대관령을 따라 백두대간을 넘기 전 방문하면 좋을 곳이 있는데, 바로 산 전체가 불교 성지로 되어있는 오대산의 사찰 월정사이다.




  월정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심의 팔각 구층 석탑이다. 그리고 석탑 앞에는,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자세로 공양하는 자세를 취한 보살상이 놓여 마주 보고 있다.
그리고 구층 석탑을 제외하고는 사찰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가 어려운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7세기에 창건된 월정사는 긴 역사가 있지만 세 번이나 전소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은 고려 충렬왕 때, 두 번째는 조선 순조 때.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비교적 최근인 6.25 전쟁 당시이다.
여기엔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데, 마지막 화재는 우리 손으로 의도적으로 불태운 것이다. 1·4후퇴 당시 북한군이 이 절에 머물 것을 염려해서 대한민국 국군이 월정사를 불태우고 내려갔던 것이다.


  만약 나처럼 ‘관동 풍류의 길’을 따라 여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이라면, 처음 시작은 월정사에서 하길 추천한다. 월정사는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오대산의 수려한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장소이다 보니 이제 막 도시를 떠나온 여행자가 마음 비우기 좋은 장소이다.
나는 그렇게 잠시 월정사를 둘러보다, 이제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향했다.


  동해가 빚어내는 황홀한 비경, 관동팔경 탐방의 시작을 경포대에서 가졌다.
간혹 경포대라고 하면 부산의 해운대처럼 지역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경포대는 경포호수 북쪽 언덕에 자리한 누각의 이름이다. 한때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언덕을 오르자, 경포대 정자 옆에 익숙한 그림들이 보였다. 경포대는 예부터 동해를 찾은 수많은 시인 묵객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의 수많은 시와 글, 그림이 남아있다.
분명 전에도 봤던 그림들이지만 실제로 묘사한 지역이 눈앞에 있으니 집중해서 다시 보게 됐다. 수백 년 전의 자연이나 지금의 자연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앞에는 경포호수가 있고, 그 뒤로 가늘고 긴 땅이 바다와의 경계를 구분짓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할 때,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쓴 [관동별곡]은 그렇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아무리 빼어난 문장으로 관동팔경의 경치를 칭송한다 해도, 옛 한글로 쓰인 고전문학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그러나 경포대에서, 문득 그때 나를 괴롭혔던 [관동별곡]이 생각나더라. 새삼 정철이란 사람이 그리 오랜 역사 속 인물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나와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느낀 것을 적었다고 생각하니까. 김홍도도 그렇고, 정선도 그랬다.
경포대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와 바다의 조화는 기품 있고 우아했다. 교과서에서 봤던 그 작품들이 왜 탄생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살면서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언젠가 내가 익혔던 지식이 실제의 경험과 합쳐질 때 오는 즐거움이란 몹시나 특별한 것이다.


  누각 천장에는 경포대에 관련된 시인 묵객들의 글이 게시되어 있다.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시’도 있고 강릉 부사를 역임했던 문관 조하망의 ‘상량문’도 있다.
그리고 사진에 보이는 글은 유년을 강릉에서 보냈던 조선 학자의 ‘경포대부’라는 글이다. 경포대의 특징적인 풍경을 계절별로 구분하여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해 성정을 다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데에 힘쓸 것이란 포부도 담겨있는 명문이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글이 무려 열 살 나이에 지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의 글인지 예측할 것 같은데, 답은 이 다음 여정에 있다.


  오죽헌은 경포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보니, 이 곳에서 나고 자란 열 살 아이가 경포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나 보다.


  오죽헌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의 동상이다.
동상 앞에는 율곡이 금과옥조처럼 품고 실천한 ‘견득사의’가 적혀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율곡이 형제 가족들까지 거둬 식솔이 100명이 넘는 대가족이었던 때가 있다. 하지만 벼슬을 관뒀을 때는 식솔들과 함께 굶는 날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인 황해도 재령 군수 최립이 쌀을 보낸 적이 있는데, 율곡은 ‘관아의 곡식을 보낸 것 같아 도저히 받을 수 없다’며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득과 손실 보다는 옳고 그름을 우선시하는 율곡이었다.


  오죽헌 가장 안쪽에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가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백 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수령이 무려 600년이 넘어, 율곡이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낼 때도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웠던 나무라고 한다.


  문성사 옆에 있는 건물에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출산했던 방 몽룡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오죽헌이라는 이름답게 검은 대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율곡은 조선 역사상 제일 가는 천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보니, 율곡의 비범함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가령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도 ‘구도장원공’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라든지.

  그러나 오죽헌에서 내가 떠올렸던 일화는 율곡이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한 일화다. 율곡은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상복을 벗었음에도 모친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19세에 속세를 떠날 결심까지 하고 불교에 심취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오죽헌에서 율곡의 유년 시절은 무척이나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했을 것만 같다.


  오죽헌을 둘러본 후에는 근처의 선교장으로 이동했다.
선교장은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 형태를 잘 보여주는 전통가옥이다.


  선교장은 개인소유의 국가민속문화유산이고 지금도 300년째 대대로 후손이 사는 주택이다. 그 때문에 오죽헌처럼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며 점차 증축되고 중건되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통일감이나 짜임새는 조금 결여되어 있으나, 지속해서 사람이 생활해 온 탓인지 거대한 규모에 비해 소박하고 인간적인 풍취가 느껴졌다.


  주변 자연환경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처마 뒤로 우뚝 솟은 소나무도 근사하고, 입구에 지어진 인공 연못과 정자는 그야말로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라는 것을 단번에 느끼게 한다.
  정자의 이름은 활래정. 여러 사람 둘러앉으면 끝날 작은 방이지만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자에서 연못을 향해 난 창문에 한 폭의 움직이는 그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유롭게 음풍농월을 즐겼을 옛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이다.


  강릉을 벗어나 계속해서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낙산사로 향했다. 자비로 중생을 보살핀다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관음성지 홍련암, 그리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의상대가 있는 역사 깊은 천년고찰이다.


  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솔숲을 지나 오봉산 정상으로 걸어갔다. 오봉산은 낙산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낙산은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의 의미다. 그만큼 낙산사는 관세음보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낙산사는 신라 시대 고승인 의상대사가 직접 관세음보살을 마주하고 창건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오봉산 정상에는 높이 1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해수관음입상은 비교적 최근인 1970년대에 세워졌는데, 그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가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동해의 넓은 해안선이 보였고, 해수관음상 뒤편으로는 저 멀리 설악산의 대청봉과 울산바위가 보였다.


  그러나 정철의 관동팔경에 기록된 4경은 정상 아래쪽 해변 가까이에 있다.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참선했던 의상대이다. 원래는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두었다.


  의상대 정자에 올라 왼쪽을 바라보면, 낙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암자 홍련암이 보인다. 홍련이라는 것은 붉은 연꽃을 의미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데에는 전해지는 창건 설화가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 때, 의상대사가 우연히 이곳에서 신비한 파랑새를 목격하고 새를 쫓아갔다. 그러나 새는 바다 위의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의상은 석굴 앞 바다 가운데 있는 바위 위에서 나체로 정좌하여 지성으로 7일 7야를 기도 드렸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붉은빛의 홍련이 솟아 올랐고, 그 안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현재 홍련암의 법당 내부에는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한때 2005년에 오봉산에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 낙산사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된 적이 있는데, 다행히도 홍련암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불길을 피했고 소실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오봉산의 낙산사를 마지막으로 관동 풍류의 길도 마무리짓는다.
이번 여행은 한국 고유 산천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낄 수 있었던 길이었다. 예로부터 강원도에 왜 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지, 백두대간과 동해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이해하게 됐다.

  혹시 ‘알랭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을 읽어보셨는지? 그 책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말이 있다. “현실을 힘들게하는 어떤 문제를 갖고 있다면,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그것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이런 문장이다.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다 보면, 우리 인생의 조금의 스트레스나 문제만 있어도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현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보는 것도 때때로 큰 도움이 된다. 강원도 관동 풍류의 길은 그런 면에서 참 매력적인 여행이다.

  이제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처음에 말했던 ‘생존 경쟁의 제약’이 있는 삶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아아, 풍류는 이제 끝났다. 몸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현실적 모드’ 스위치를 켤 시간이다.
  그러나 다시 속세에 돌아가는 게 마냥 싫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잠시 이렇게 풍류를 즐기러 떠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늘 경계에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실과 이상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야말로,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는 삶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서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관동 풍류의 길에 어울리는 맛이라 하면, 응당 머릿속에 바다가 떠오는 맛이어야 할 것이다. 음식을 입속에 넣는 순간 멀리서부터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왕이면 술이랑도 잘 어울리는 음식이면 좋겠다. 한국의 풍류를 이야기할 때 음주가무를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추천할 관동 풍류의 맛은 ‘초당순두부’와 ‘오징어순대’이다.


초당순두부만큼 동해바다를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음식이 있을까. 바닷물을 간수로 하여 만드는 초당두부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로 유명한 초당 허엽 선생에게서 기원했다고 한다.
잘 만든 초당순두부는 파도가 치고 나타나는 하얀 포말처럼 몽글몽글 부서진다. 한입 가득 입 속에 넣으면 썰물처럼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젊은이들 입맛을 겨냥한 짬뽕 순두부도 별미이지만, 바다 향 깃든 순두부의 정수를 느끼고 싶다면 하얀 순두부를 추천한다.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 오징어순대는 말 그대로 오징어 몸통에 소를 채워 넣어 쪄낸 요리이다. 어떻게 이런 요리를 생각해 냈는지 기발하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 각지에는 오징어에 속을 채워 만든 유사한 음식들이 꽤 있다. 그만큼 보장된 요리법인 것이다.
요즘엔 그냥 쪄내는 것이 아니라 계란물을 부어 전처럼 부쳐내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중요하지 않다. 결국엔 맛만 좋으면 되는 법.
오징어순대를 맛있게 먹는 방법의 하나는 포장해서 숙소에서 먹는 것이다. 손 시릴 정도로 차가운 술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침대가 옆에 있으니 걱정도 없다. 오징어순대 한 점과 술 한 모금이면 세상은 어느새 행복으로 허물어져 간다.
현대에는 아마 이런 것조차도 관동 풍류의 일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by 여행작가 박성호





프롤로그 / 떠날 길이 하영 남았다

  나는 직업 여행가로 살고 있다. 좋건 나쁘건, 늘 떠나 있거나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삶이다. 내게 일상은 언제나 이 둘 중 하나다. 다행히 아직은 젊고 팔팔하니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세월이 흘러 그 후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걱정하고 살았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겠지.

  여하간 올해도 세계 방방곡곡 떠돌다 한국에 돌아왔다.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을까? 오랜만에 내방 방바닥에 누워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겠군’ 하고 있었는데, 돌연 ‘국가유산 열 개의 길 여행기’를 연재하게 됐다.
뭐, 고작 열 개면 쉬엄쉬엄 다니면 되겠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길 하나에 다녀와야 할 장소가 대여섯 개씩 있다. 그것도 전국 금수강산 곳곳에 퍼져서. 천천히 정리해야지, 하고 구석에 박아뒀던 배낭이 그대로 있길 다행이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열 개의 길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여행지를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고르시나요?” 그러고 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반복된 질문은 일종의 모범 답안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라,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내가 평소에 보고 사는 풍경과 얼마나 다른지를 첫 번째로 생각해요.”
여행이 많아지다 보니 떠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그 때문에 내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떠나서 실제로 ‘떠났다’라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단순히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좋은 의미의 ‘일탈’이야 말로 내가 원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런 내게, 제주도야말로 긴 여행의 포문을 열기에 제격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제주도에 가는 것이 언제나 즐겁고 설렌다. 수십 번을 다녔는데도 그렇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이 여전히 ‘떠나왔다’고 느끼게 한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배낭을 메고 공항을 나서자마자 제주의 세찬 바람이 나를 반겼다. 하늘은 프러시안블루로 맑게 개었다. 자연스레 방구석에서 재충전을 꿈꾸던 마음이 쓰윽 열렸다.
이런 산뜻한 시작이라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제주 말로 하영(많이) 남았지만, 무엇이 나를 막으리.
세상엔 설레는 출발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다. 나는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찾는다는 으뜸 명소, 성산 일출봉을 찾았다.
로마에 간 사람이 콜로세움을 찾고 파리에 간 사람은 에펠탑을 찾듯이 제주도 하면 ‘성산 일출봉’, 하고 어려서부터 익히 보고 들었다. 심지어는 ‘성산 일출봉에 오르지 않고 제주도에 다녀왔다 말하지 말라’ 하는 사람도 봤다.
나는 이 정도 유명한 곳엔 반기를 들고 싶을 때가 있다. ‘흥, 나는 그런 여행자의 의무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서 무관심한 척하고 싶어진달까. 확실히 어른스러운 짓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런 나도 성산 일출봉은 여러 번 올랐다. 처음은 언젠가 수학여행 왔을 때 못 이기는 척하며 터덜터덜 올랐고, 그 후론 운동하는 셈 치고 자발적으로 올랐다. 그러면서 늘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괜히 으뜸 명소가 아니야. 멋있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그러나 여전히 완전히 지고 싶지는 않아서, ‘제주도에 다녀왔다 하려면 최소한 백록담은 올라 봐야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 아마 백록담은 오르기 쉽지 않은 터라 성산 일출봉이 ‘제주도의 상징적인 명소’ 타이틀을 대신 차지한 게 아닌가 싶다


  성산일출봉을 오르면서 눈에 띄는 건 계단 옆에 우뚝 솟아있는 ‘등경돌’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돌은 어느 할머니가 바느질하는데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라고 한다. ‘아니 무슨 이렇게 거대한 돌 위에 등잔을 올려놓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바느질하던 할머니의 키가 워낙 컸다.
전설 속 이 할머니의 이름은 ‘설문대할망’. 키가 어느 정도로 컸냐 하면,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워 다리를 뻗으면 발끝이 제주도 앞바다 관탈섬에 걸쳤다고 한다. 지도에서 이 거리를 재어보면 대략 40킬로미터쯤 된다. ‘설문대할망’이 매일 등경돌에 불을 켜고 바느질을 한 것은 옷이 한 벌 뿐이라 그렇다는데, 한 벌이라도 맞는 옷이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게 무척이나 상쾌했다. 한눈에 담기는 광활한 풍경에 나 역시 거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여하간 제주도를 여행할 때 이 ‘설문대할망’ 설화를 따라가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애초에 푸른 바다 한가운데 제주도를 만든 장본인이 ‘설문대할망’이기 때문이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에서부터 치마에 흙을 퍼 담아와 섬을 쌓았다. 아무리 깊은 바다도 무릎 위를 넘기지 않았다고 하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섬 가운데 남은 흙을 모두 털어 넣어 한라산을 만들었다. 다만 이게 너무 높고 뾰족하다 보니 앉기 불편해서 봉우리를 꺾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푹 파여 있는 백록담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설문대할망’이 멀리 던져버린 봉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봉우리를 찾기 위해 정상에서 내려와 남서쪽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제주에는 3대 명산으로 불리는 산이 세 개 있다. 하나는 중심의 한라산, 하나는 동쪽 끝의 성산일출봉.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한라산 봉우리를 뚝 떼어다가 던져버려 만들어졌다는 서남단의 명산, 산방산이다.


  서귀포 시내를 지나 서쪽으로 향할수록 산방산이 멀리서부터 웅장함을 뽐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네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평탄한 지형 위에 홀로 우뚝 솟아 있으니, 그것만 보고 따라가면 된다.
산방산이 한라산의 꼭대기라는 전설이 생겨난 이유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선 백록담의 지름과 산방산 밑 둘레가 얼추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고, 한라산 정상의 돌 재질이 산방산과 마찬가지로 조면암으로 되어있다. 더욱이 산방산 생김새가 분화구 없는 종 모양으로 생겼다 보니 한라산의 비어있는 머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산방산 매표소로 입장해 산책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산방이라는 이름은 산 중턱에 방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산책로의 끝에 있는 해식동굴 산방굴을 말한다. 이 안쪽에는 불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산방굴사라고 하였다.
산책로로 갈 수 있는 건 이 산방굴사까지다. 산방산 암벽에는 학술 가치가 높은 희귀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산방산의 문화유산적 가치 보존과 천연기념물인 암벽 식물지대 보호를 위해 이외의 지역은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용머리 해안의 근사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물결치듯 유려하게 굽어있는 모습이 왜 용머리해안인지 굳이 의문을 품지 않게 한다. 산방산 자락에서 바다로 뻗어나가는 역동적인 기세의 용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해발 150m 부근의 산방굴사에 도착했다.
가장 윗단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어 정면으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굴은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굴 내부 천장의 암벽 사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똑똑 소리를 내며 고요한 동굴 안을 깨운다. 그 소리가 어째 영험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역시나 산방덕의 눈물이란 전설을 품고 있다.
  산방덕은 하늘나라 선녀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고성목이라는 나무꾼과 결혼했다.
그러나 대부분전설엔 해피엔딩보다는 구슬프거나 애틋한 이야기가 많다.
고을의 사또가 그녀의 미모에 빠져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사또는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강제로 둘을 이별하게 만든다. 이에 분노한 선녀는 산방굴사로 들어와 며칠을 목 놓아 울다가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은 산방덕의 눈물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이토록 슬픈 전설을 담고 있는 산방굴사이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마침, 이른 아침 시간이라 아무도 없이 조용히 감상할 수 있었다.
저 멀리 바다 건너엔 절벽으로 둘러싸인 송악산도 보였다. 그 뒤엔 평평한 가오리를 닮은 가파도가 있었고, 그 뒤엔 대한민국 최남단 섬인 마라도가 보였다.



  그리고 사실 마라도는 내 다음 여정이기도 했다.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모습에 미리부터 반가웠는데, 산방산을 내려와 해안으로 가보니 파도가 몹시도 성나 있었다. 배에서 꽤 고생하겠구나, 했는데 조금이라도 고생할 일은 없었다. 그날의 모든 출항이 결항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로 실망한다거나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조금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당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긴 시간 여행하며 얻은 것 중 하나는, 예상 못한 상황에 대한 맷집이다. 나한테 여행은 늘 우연함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제주도에는 바람이 많이 불수록, 파도가 거셀수록 좋은 곳도 있다.


  주상절리는 자주 찾게 되는 곳은 아니다. 푸른 제주 바다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앞의 육각형 기암괴석은, ‘으음, 신기하게 생겼네.’ 하고 처음 몇 번만 관심을 가질 뿐이니까.
  그러나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다면, 어쩐지 심상찮은 파도가 몰려온다면 꼭 한 번 주상절리대를 찾아보길. 그런 날의 주상절리는 숨겨놓은 발톱을 꺼내 드는 사나운 맹수 같다.


  철썩, 집채만한 파도가 칠 때마다 절벽을 타고 올라와 하얀 포말로 부서진다. 바람에 날려 와 차갑게 얼굴을 때린다. 나는 도마 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횟감의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파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엄청났다. 세상의 어수선함을 한 방에 정리해 버리는 압도적인 힘이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도시에 살며 늘 느꼈던 ‘인간은 참 대단해’하는 생각이 순수한 소꿉장난처럼 느껴진다.




  바닷바람이 제법 소슬하게 느껴질 즈음, 이번엔 주상절리와는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쇠소깍을 찾았다. 쇠소깍은 담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깊은 웅덩이 지형인데, 제주 낱말로 쇠소는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연못을 의미하고 깍은 끝을 의미한다.


  바람은 여전히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모래 해변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쇠소깍의 수면은 놀라울 만큼 잔잔했다.
쇠소깍의 매력은 바로 이 대비에 있다. 한순간 다른 세계로 뛰어든 것처럼 만드는 극적인 대비. 더욱이 흘러내린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진 기암괴석과 울창한 삼림은 마치 이곳을 신비한 비밀의 장소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렇게 신비한 명소에 전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유난히 푸르고 투명한 쇠소깍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므로, 과거에는 이곳은 ‘용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름에 가뭄이 들면 용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에는 신성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물놀이하거나 돌을 던지는 것도 못 하게 했다는데, 지금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노 젓는 카약이나 전통 뗏목 ‘테우’를 타며 경치를 즐기고 있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그동안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며 바다는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여정을 마무리할 장소로 거문오름을 찾았다. 숲이 우거져 검게 보이기 때문에 ‘검은 오름’이란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참고로 오름이란 단 한 차례의 분출만을 일으키고 명을 다한 화산을 말한다. 다시 말해 아주 오래전 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한 화산들의 무덤이랄까.
물론 이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고, 전설에 따르면 오름 역시 ‘선문대할망’의 작품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할망이다. 다만 일부러 의도해서 만든 것은 아니고, 치맛자락으로 흙을 옮기다 실수로 흘린 것들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전역에는 360여 개의 수많은 오름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거문오름이 유일하다. 그만큼 자연유산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별적인 출입이 어렵고, 대신 자연환경 해설사를 따라 함께 탐방로를 걸을 수 있다.
나는 미리 전날에 오전 첫 번째 트래킹을 예약해두었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서른 명의 여행객이 입구에 모여 함께 숲으로 출발했다.



  입구에서부터 삼나무와 편백, 소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빼곡히 자라나 있었다. 나무들의 촘촘한 잎 사이로 가느다란 빛발이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숲속을 환히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연 ‘거문오름’이라 부를 만 했다.
처음 약 30분가량은 계속해서 오르막길이 이어져 있지만, 무성히 자란 나무가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어서 제법 서늘했다. 걷기에 딱 좋은 길이었다.



  혹여나 제주의 여느 다른 오름처럼 탁 트인 전망을 기대하고 찾았다면 거문오름은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문오름 탐방로에는 숲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구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오름의 정상조차도, ‘이곳이 정상입니다.’하는 표지판만 있을 뿐 좌우가 긴 동굴처럼 막혀있다.
하지만 신비로운 숲의 생태를 관찰하기 좋아한다면, 축축한 습기를 통해 전해오는 싱그러운 풀 내음을 좋아한다면 거문오름은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가 된다. 지층 변화로 생긴 풍혈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천연 에어컨 역할까지 해주니 말이다. 더욱이 세상을 덮은 신록의 풍경은,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고 생기 있는 색인가 느끼게 한다.



설화와 자연의 길 에필로그

  푸른색 이 길을 끝으로 첫 번째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을 마무리했다. 문자 그대로 제주도의 이야기와 자연을 따라 걷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끝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설문대할망’ 전설 중에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언젠가 제주도가 다 만들어져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설문대할망은 자신이 입을 속옷을 만들기 위해 명주 100동을 모아 달라고 제주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명주 1동은 50필인데 한 필의 길이는 대략 20m나 된다. 그러니 명주 100동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 때문에 설문대할망은 보답으로 제주에서 목포를 잇는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제주도와 육지를 잇는 다리는 생기지 않았고, 제주도는 지금까지 그대로 섬으로 남아있다. 딱 99동을 모으고 하필이면 한 필이 모자랐던 탓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아마 한 필이 부족했던 건 설문대할망이 숨겼거나 거짓말을 한 까닭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 한 필이 모자를 리 있나. 아무리 전설이어도 말이다.

  하여간 제주도는 발길 닿는 곳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니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제주도의 풍경이 단조롭고 밋밋함 투성이였다면 이런 전설이 먹혀들 리 없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제주도에 전설이 넘쳐 나는 건 순전히 자연 덕이다. 이런 신비로운 자연에서는, 때로는 영화 같은, 때로는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잔뜩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제주도는 태생이 그런 섬이다.


  끝으로 ‘설화와 자연의 길’ 여행에 어울리는 맛을 추천해 본다.
나는 사람의 기억은 오감을 통해 짙게 남는다고 믿는 사람이다. 눈으로, 귀로, 코로, 혀로, 피부로 다양하게 느낄수록 그 흔적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다.
그러니 여행에서의 음식은 이른바 ‘추억의 방부제’ 같은 거다. 말이 요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음식은 여행의 기억을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추천하는 첫 번째 음식은 갈치국이다. 갈치조림은 먹어봤어도 갈치국은 처음 듣는다고? 그럴 수 있다. 지방이 많은 갈치는 자칫 잘못하면 비린내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갈치로 국을 끓여 먹는 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갈치국은 ‘가장 제주다운’ 향토 요리라 할 수 있다. 제주 앞바다에서 공수한 싱싱한 제주 은갈치에, 큼직하게 썬 호박과 얼갈이배추. 여기한 칼칼한 매운 고추가 전부인 갈치국은 그야말로 제주도 갈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제주도의 맛을 꼽는데 흑돼지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를 먹는다.’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의례처럼 자리 잡아서, 제주도 여행을 했는데 흑돼지를 먹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야기의 완결을 내지 못한 기분이다. 불판 위에 잔뜩 졸인 멜젓에 흠뻑 담가 먹는 흑돼지. 그 맛은 말해서 무엇하리.
그래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저녁도 의례적으로 흑돼지를 먹었다. 점심을 많이 먹은 상태였지만, 평소 같으면 양을 조절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오늘은 여행기를 쓰기 위함이니까.’ 하는 책임감으로 양껏 먹었다. 나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인가 보다. 오겹살도 먹고 항정살까지 먹었다.
언젠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왔을 때, 흑돼지 두루치기 하나를 건장한 학생 여럿이 나눠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어 여행을 떠난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by 여행작가 박성호

프롤로그 : 여행자와 이방인

  여행하며 지구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세상엔 참 살기 좋은 곳이 많다고 느끼게 된다.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여유도 있고. 나는 서울에 태어나 나고 자란 사람이지만, 많은 면에서 서울보다 나아보이는 동네도 잔뜩 있다.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에 ‘외국에 다녀온 사람의 입 다물기’가 있다 보니, 가끔은 이런 장소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닌다.
“노르웨이에 뵘로란 동네가 지내기 좋더라고요.”, “니카라과에 오메테페란 섬이 있는데 거긴 몇 달을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누군가 내게, “혹시나 나중에 살고 싶은 장소가 있으신가요?”하고 물으면 내 대답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확고해진다. “한국이요. 한국 살고 싶어요.”
유년 시절 기억의 배경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한평생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 속에서 무슨 음식을 먹고 살아왔는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인생에 처음 입력된 기억들은 쉽게 거역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외국에선 늘 이방인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언젠가 중미 정글 속 고대 마야 유적들을 탐험하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것 참 신기하긴 한데, 실제로 이 곳에 나같은 사람이 잔뜩 모여 사는 모습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가 않는군. 내가 마야인의 후손도 아니고.’

  이번에 내가 여행할 길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걸을 ‘왕가의 길’이다. 긴 세월 동안 천천히 쌓아져 온 왕가의 길은 한반도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들이 서려 있는 길이다.
그러니 이번 길은 우리나라의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이자, 걷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길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왕가의 길을 시작하기 위해 인류 역사의 시작되기 이전, 선사시대로 되돌아가 보자.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무려 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거나 채집하며 생활하던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십만 년 후, 농경이 시작된 기원전 8,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자 마침내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곳곳에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강한 족장이 주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 국가로 발전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데, 한반도 왕가의 길을 시작하게 된 지점도 바로 이 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고인돌 집중 밀집 지역’이다. 세계 전체 고인돌의 절반에 가까운 4만 여 기가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강화도에서는 보존 상태가 좋고 형태가 다양한 고인돌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인돌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탁자식’ 고인돌을 찾으러 강화도 부근리에 있는 지석묘를 찾았다.


  강화도 고려산 북쪽 끝자락 넓은 언덕에 육중한 고인돌이 외롭게 서 있다.
고대 거석 기념물만큼 권력의 위엄과 상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대형 버스 약 세 대에 맞먹는 무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돌을 바라봤다. 그 옛날 이 무거운 돌을 받침돌 위에 올려놓은 것도 신기하고, 수천 년 넘게 이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도 신기했다. 종종 유적이나 풍화, 침식된 자연을 볼 때면 억겁의 세월 앞에 모든 게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제 떠날까 하는데 유치원 꼬마들이 잔뜩 체험학습을 왔다. 선생님 따라 쫄래쫄래 언덕을 올라오더니, ‘우와아, 크다’ 하며 몇 바퀴 돌다가 다시 줄 맞춰서 내려갔다. 돌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내 인생 삼십 몇 년도 이렇게나 긴데, 수천 년 전의 유적이라니.’ 아이들은 이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나 보다.
하긴 나도 그랬지. 여기서 오십 년쯤 더 살게 되면 멈춰있는 돌덩이를 보고 눈물까지 흘리게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고인돌 유적지를 빠져나와 강화도를 벗어나기 전에, 방문해야 할 왕가의 길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익히 알고 있듯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는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다. 마침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명소가 두 곳 있는데, 하나는 단군이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이 있는 마니산이고, 하나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다.
이번에 방문 할 장소는 이 삼랑성 내부에 위치한 1600년 역사의 강화 전등사이다.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천년고찰이다.


  밖에다 차를 대놓고 삼랑성 성벽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가득했다. 다만 소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심지어는 시멘트가 발라져 있기까지 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 당시 무기의 대체 연료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상흔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전등사의 풍경이 산과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고구려 시기에 세워진 전등사는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던 사찰로서 중하게 여겨졌다. 원래의 이름은 ‘참된 종교를 추구하라’는 의미로 진종사였으나, 1281년 충렬왕의 왕비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이다.


  전등사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억압하던(숭유억불) 조선에서도 왕실 사찰로서 비호를 받던 사찰이다. 전등사가 있는 삼랑성 안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전등사가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 사찰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만큼 사찰 안에는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역사책처럼 남아있다. 하나하나 풍부한 이야기와 시대를 품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강화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오는 길, 김포에 있는 장릉을 찾았다.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왕릉은 문화의 보고이자 풍수지리상 명당의 상징이다. 왕가의 길에서 놓칠 수 없는 여행지다.


김포 장릉은 산의 경사가 완만해 능이 자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신비한 분위기의 숲길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는데, 소나무가 많이 심겨 있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르고 기상이 좋은 소나무는 풍수 사상에서 명당 자리에 심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수목이기 때문이다.


  숲길을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하니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가 잠들어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임금의 무덤이라 하기엔 어쩐지 소박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 곳은 원래 왕릉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임금의 아버지 묘인 대원군 묘로 조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제14대 선조의 아들이자 제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은 추존 왕이다. 죽은 후에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아들인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켰다. 원종은 왕자인 정원군이었던 당시 세자로 있던 적이 없었기에 추존이 부적절하다는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여하간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원체 흥미진진 이야기가 많아 끝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찾다 보면 그 이후 왕, 그 이전 왕가의 이야기까지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음 여정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다시 숲길을 걸어 나온 나는 이제 조선 역사의 중심, 한양으로 향했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옛 고조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개경에서 조선을 건국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초대 국왕인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 지 채 한 달도 한 돼 천도를 결심한다.
여러 후보지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했다. 도읍지 설계의 총책임은 개국공신 정도전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3년 후 새로운 궁궐이 완공되었고,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하라’는 의미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경복궁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지나치게 되지만 볼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휘황찬란한 수많은 현대식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언제나 중심에서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정문인 광화문을 통해 경복궁에 입장하니, 중문인 흥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8월의 더운 날씨였지만 한국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이 걸음을 멈추고 경건히 의식을 관람했다.
수문장 제도는 15세기 조선 전기에 정비되었는데, 지금의 의식은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인들의 복식과 무기, 각종 의장물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이어서 흥례문과 근정문을 지나 경복궁의 핵심 건물인 근정전으로 입장했다.
근정전 앞은 임금의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식 같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의식과 행사들이 열리던 곳이다. 이 마당의 이름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조정’이다. 그리고 ‘근정’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붙였는데,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뜻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조정 바닥의 돌이 매끈하지 않고 상당히 울퉁불퉁하다는 점인데, 이는 임금이 위에서 조정을 내려다볼 때 너무 강한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그리고 근정전의 왕좌는 마치 어둑한 허공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근정전 내 넓은 바닥이 한결같이 거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의도한 것이다. 근정전이 구름 위의 하늘 궁전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에도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돌계단 사방에는 각 방향의 하늘을 상징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별자리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근정전 서편으로 이동해 경회루 연못을 따라 걸어본다. 연못에 비치는 인왕산의 산세가 수려하다.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지금의 경복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 대부분 소실된 탓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들으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럼, 그사이 긴 시간 동안 경복궁은 어떻게 되었던 것일까?’ 하고.

  사실 경복궁은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던 궁궐이다. 전란이 끝난 이후 조선 정부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모되는 경복궁 복원을 포기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한 것이다.
대신 1610년, 광해군은 경복궁이 아닌 다른 궁을 먼저 중건해 조선의 제1 궁궐, 법궁으로 선포한다. 그곳이 이번 왕가의 길 마지막 여정이다.


  경복궁에서 안국역을 지나 창덕궁으로 걸어갔다. 불과 이 십여 분 만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 닿았다.
창덕궁은 태종의 주도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십여 년 만에 이렇게 가까이 새로운 궁을 지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경복궁은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 데다(1차 왕자의 난), 자신의 정적인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궁이기 때문에 태종에게는 꺼림칙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태종은 왕위에 즉위한 직후 조선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는 와중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창덕궁과 경복궁의 가장 큰 차이는 궁궐의 형태에 있다. 경복궁이 기하학적인 대칭을 중시하며 왕가의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낸 것과는 달리, 창덕궁은 주변 환경에 맞추어 얽매임 없이 지어졌다. 전형적인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뛰어난 조화를 이루게 건설된 것이다.
  때문에 창덕궁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라면 색다른 궁궐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게 될 수도 있다. 건물들은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으며, 심지어 궁궐의 중심이 되는 정전인 인정전은 정문과 완전히 틀어져 있다.



  재밌는 점은 창덕궁의 이러한 특징이 정작 건설을 명령했던 태종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창덕궁의 공사 책임은 당시 판한성부사(지금의 서울시장 격)였던 박자청이 맡았다. 그런데 심지어 태종은 박자청을 하옥시키기도 했다. 인정문 밖 마당의 구역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 명령 했는데, 박자청이 산세를 살리고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사다리꼴로 만든 탓이었다.
  결국 가장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찬사를 받는 지금의 창덕궁은 박자청이라는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의도된 설계였다.


  나는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해둔 덕에 후원 관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사상, 정서를 보여주는 대표적 정원이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이곳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되었고 세조, 성종 대에 확장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되면서 광해군 대에 다시 조성된 곳이다.



  사실 창덕궁 후원은 오랜 시간 ‘왕가의 비밀스러운 정원’이란 의미로 ‘비원(秘苑)’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지금은 울창한 숲과 연못을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편히 걸을 수 있으니, 비원이라는 말은 더 이상 맞지 않는 것 같다. 한 편으론 이 모든 과거의 풍경들이 더 이상 비밀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던 지.
  골짜기마다 자연의 지세에 따라 잘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정자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왕가에서는 이곳을 휴식과 산책을 비롯한 여러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후원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 있어 학문을 탐구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자연 풍광을 느끼며 시를 짓고 꽃구경 하며 치유를 받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천천히 드넓은 후원을 누볐다.

왕가의 길 에필로그

  나도 이제 제법 머리가 굵어서 그런가? 한반도의 고조선과 삼국시대의 역사가, 조선 왕조의 역사가 흥미로운 소설만큼이나 재밌다. 왕실의 유적과 유물에 남아있는 풍부한 이야기 하나하나에 쉽게 몰입해서 빠져들게 된다.
왕가의 길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이자 조선 왕조 오백 년 역사의 수도였던 수도권 일대는, 무척이나 다양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세세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의 길에서 만나는 문화유산들은 저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더욱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거미줄처럼 또 다른 이야기들과 연결되어 있으니, 한 번 빠져들면 ‘한 편만 더, 한 편만 더’해가며 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멈추기 어렵다.

  결국에는 나도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가 보다. 점점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할 수록,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 볼 수록 되려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세상에 어떤 강을 여행해도 한강만큼 내게 특별함을 느끼게 하는 강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내가 이렇게 떠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결국에는 돌아 올 정겨운 장소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 길을 걸으면서 다시금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장소가 공감할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다.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들 사이에 사는 지 잊지 않게 해준다.



  왕가의 길에 추천할 음식은 서울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이다.
설렁탕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조선 시대 임금이 농사가 잘되길 기원하며 직접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 제단과 관련이 있다. 왕이 제사 의식을 진행하고 행사가 끝나면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소고기 국물을 나눠줘 거기에 밥을 말아 먹었던 것이 시초라는 이야기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유래설이 있다. 하지만 설렁탕이 한때 조선의 외식 문화를 제패했던 패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종로와 청계천 주변엔 역사 깊은 설렁탕집이 여럿 남아있다.


  진하고 뽀얀 국물에 향긋함을 더하는 파와 얇게 썰린 소고기 한 점. 한국전쟁 이후 미국 원조가 시작되며 더해진 얇은 밀가루 국수. 여기에 갓 지은 따듯한 흰 쌀밥과 아삭시큼한 깍두기까지.
그 아름다운 맛의 조화는 한국 사람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앉자마자 곧바로 내오는 패스트푸드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으니, 간편히 한 그릇 때우기 위한 바쁜 현대인에게도 부담이 없다.

  나는 설렁탕을 먹을 때,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밥을 말기 전 늘 국물부터 한 수저 맛본다. 슴슴하지만 감칠맛 가득한 맛이 중독성 있다. ‘아, 그래 설렁탕은 이 맛에 먹지’ 하며 생각하는 찰나, 머릿속 한편에선 비통한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김첨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설렁탕은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을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한 맛이다. 설렁탕을 먹을 땐 늘 그런 생각을 한다.

by 여행작가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