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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봄, 여름호-옛날 옛적에]신묘한 여우 구슬, 인간의 욕망과 그 한계를 말하다
작성자 : 진흥원 관리자 작성일 : 2024-09-22 조회수 : 1519


신묘한 여우 구슬,

인간의 욕망과 그 한계를 말하다


글. 오세정(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간의 욕망을 극적으로 표현한 환상적 이야기, <여우 구슬>


아직 미성숙한 존재인 소년이 학업을 소홀히 하고 미녀와의 성적 탐닉에 빠지며 위기에 처한다. 소년은 여인에게 기력을 빼앗겨 죽기 직전에 이르는데, 이 소년은 과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년의 기력을 빼앗는 아름다운 처녀는 알고 보니 구미호였다. 소년이 살기 위해서는 여우와 입맞춤할 때 입으로 주고받은 여우 구슬을 삼켜 버려야 한다. 여우의 구슬을 삼킨 자는 세상의 이치를 통달해 성공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어찌 보면 소년이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통과의례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렇게만 제한하기에는 여우와 여우 구슬의 의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간다. 성적 환상의 대상인 아름다운 여인이자 동시에 남성을 죽게 하는 여우, 세상의 이치를 통달하게 하는 구슬, 이를 통해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삼역총해(만주어, 1714년)_(국립중앙도서관)


일러스트: 심은경



설화를 통한 한국인의 사유 읽기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이다. 아무리 뛰어나고 강고한 것도, 아름답고 찬란한 것도, 시간은 모두 소멸시켜 버린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자식조차 집어삼켜 버리는 매정하고 흉폭한 크로노스(사투르누스)가 바로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간의 가공한 힘을 버티면서 끊기거나 사라지지 않고 구전(口傳)되어 지금까지 전해 온 설화(說話)야말로 우리의 사고방식, 욕망, 상상력, 세계관을 온전히 담고 있는 ‘최고(最古)’의 그리고 동시에 ‘살아 있는’ 문화 자산이라 할 수 있다. 문자라는 안정적인 매체 없이도 무시무시한 시간의 압력을 버텨 온 우리의 설화를 통해 거기에 새겨진 한국인들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한국인들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나아가 전 세계에서 이야깃거리로 많이 활용되는 동물 중에 여우가 있다. 여우는 현실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지만 결코 인간과 친근할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다. 여우는 흔히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탁월하며 때로는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된다. 한국의 설화 중에 여우와 관련된 것 가운데, 가장 널리 전승된 이야기로 여우가 가진 신묘한 주물(呪物), ‘여우 구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는 여우와 여우 구슬에 대한 인간의 환상적 시선과 세속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또한 뛰어난 인물이 가진 능력의 출처를 설명하려는 논리적 사고와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에 대한 반 성적 사고가 녹아 있기도 하다.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중 일부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중 일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청남도 천흥사에서 고려 전기에 제작된 범종.

용뉴(범종의 가장 위쪽 용의 모습을 한 고리) 부분이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소년의 정기를 뺏는 여우, 그로부터 구슬을 뺏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전해지는 <여우 구슬>이라는 제목으로 묶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소년이 서당에 가려고 고개를 넘는데 예쁜 처녀가 나타나더니 입맞춤을 하였다. 처녀는 소년과 입맞춤을 할 때 입으로 구슬을 주고받으며 희롱하였다. 며칠 동안 처녀와 입맞춤을 나눈 소년은 점점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야위어 갔다. 이를 눈치챈 서당 선생이 소년에게 까닭을 묻자 소년 이 그동안의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서당 선생은 그 처녀가 여우이니 다음에 또 입안으로 구슬을 집어넣으면 그것을 삼키고 하늘을 보라고 일러 주었다. 다음 날 소년이 처녀를 만나 입맞춤을 할 때 자기 입속으로 들어온 여우 구슬을 삼켰다. 그러자 처녀가 여우로 변하고 소년은 그만 놀라 도망치다 엎어져서 땅을 보게 되었다. 하늘을 보았으면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게 되는데 땅을 보는 바람에 땅의 이치에 통달하게 되었다. 이후 소년은 훌륭한 지관(地官)이 되었다.1)


1) 여우 구슬 설화의 각편과 특성, 기본 줄거리는 다음 글 참조. 최원오, 「여우 구슬」, 편집위원회 편, 『한국민속문학사전』, 국립민 속박물관, 2012., 나지영, 「<여우구슬>과 성(性)불안의 극복」, 『고전문학과 교육』 14,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07.


소년의 기력을 빼앗는 여우로부터 신묘한 구슬을 빼앗아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구전되는 설화이다 보니 각편(各篇, version)에 따라 세부 내용에서 차이가 나기도 한다. 서당에서 잠든 100명의 학동들과 입맞춤을 하는 여우 이야기가 있는데, 이 경우는 여우가 승천(昇 天)하기 위해서 사내 100명의 기력을 앗아야 한다. 학동 99명의 기력을 뺏었으나 마지막 학동이 위기에서 벗어나 여우 구슬을 차지하게 되었다. <여우 구슬> 설화 중에는 지역마다 유명한 실존 인물에 관한 것도 있는데, 그 인물이 여우 구슬을 차지한 소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주로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 진 유학자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이황(李滉), 조목(趙穆), 송시열(宋時烈), 이식(李植) 등의 인물 전설이 전한다. 한국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道詵) 또한 여우 구슬을 차지한 인물로 나온다. 


「원광서학」, 『삼국유사』


「원광서학」, 『삼국유사』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광법사가 여우 형상을 한 신을 만난 이야기가 전한다.



구전되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여우 구슬을 삼킨 소년이 하늘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땅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구슬을 삼킨 후 땅이 아니라 인간을 처음 쳐다보는 바람에 인간의 이치를 알게 되어 명의(名醫)가 되었다고도 한다.



성스러움과 요사스러움을 함께 지닌 여우


이 이야기에 우리가 매료되는 것은 단연 신묘한 구슬이 갖는 매력 때문이다. 여우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길래 여우의 구슬이 세상의 이치를 통달하는 주물이 될 수 있었을까? 여우는 오래전부터 인간에게 있어 성스러움과 요사스러움을 가진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극단적으로는 ‘신(神)’이기도 하고 ‘요괴’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에서는 미래를 예견하고 득도의 방법을 알려 주는, 거대한 신체를 가진 신이 등장하는데, 종국에 드러내는 신의 형상이 바로 여우이다. 동시에 『삼국유사』에서는 왕조의 몰락을 전조(前兆)하는 불길한 존재로서 여우가 등장하거나 용왕 일가의 간을 빼먹는 사특(邪慝)한 존재로 나오기도 한다. 한국뿐만이 아니다. 중국 고대의 신화적 상상력의 보고인 『산해경(山海經)』에서도 꼬리 아홉 달 린 구미호를 상서로운 존재이자 사람을 잡아먹는 요사스러운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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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 구미호 삽화
출처: wikipedia 


여우가 성스러움과 요사스러움, 긍정과 부정의 양가적 성질을 모두 가졌다는 것은 여우라는 대상이 하나로 규정될 수 없이 모호하거나 미지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해가 뜬 밝은 날 잠깐 오는 비를 여우비라고 하며 여우가 시집간다고 말해 왔다. 비단 한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속신(俗信)들을 찾을 수 있다. 

양가적 성질이 가장 극화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이 미인(美人)이다. 특히 전근대의 남성주의 시각에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은 곧 팜므파탈(femme fatale,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아름답다는 지고의 가치와 기존 질서나 규범을 해친다는 부정의 가치를 한 몸에 체화한 존재가 알고 보니 여우였던 것이다. 중국 은나라 시대, 주왕(紂王)을 유혹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국사를 농단한 달기(妲玘)는 경국지색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서는 달기의 정체가 구미호로 묘사된다. 일본의 경우에도,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에 도바 천황(鳥羽天皇)을 유혹하고 천황을 병들게 해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다마모노마에(玉藻前)가 구미호라고 한다.2) <여우 구슬> 설화에서도 기력을 뺏기면서까지 입맞춤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미인이 여우인 것이다. 


2) 노성환, 「한일설화에 나타난 여우구슬의 비교 연구」, 『일본어문학』 87, 일본어문학회, 2019, 430~431쪽.


중국 은나라 시대 경국지색의 아이콘 달기
중국 은나라 시대 경국지색의 아이콘 달기
출처: wikipedia
에도 시대의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가 그린 달기. 구미호로 변신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변신에 대한 욕망, 여우 구슬에 응축하다


양가적 속성을 지닌 여우가 가진 주요한 특성으로 ‘변신’ 능력을 들 수 있다. 여우는 ‘백여우’나 ‘구미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해 소년들을 유혹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들이 품은 신화적 상상력의 근원을 이 같은 존재의 변신에서 찾기도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집대성한 오비디우스(Ovidius, Publius Naso: B.C.43~A.D.17)는 이 설화집의 제목을 ‘변신 이야기’로 명명했다. 우리 신화에서도 하백과 해모수, 수로와 탈해가 자신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둔갑술을 사용한 사례를 볼 수 있다. 변신 능력을 가진 존재로 한국에서는 동물 중 단연 여우가 대표격이다. 변신 능력은 초월적 능력 내지 신통력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데,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도 전우치가 구미호의 여우 구슬을 획득해서 72가지 변신술을 부릴 수 있게 된다. 동양에서 변신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상상의 동물은 용(龍)이다. 이무기에서 용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용으로 변신하기 위해 서는 ‘여의주’가 필요한데, 용의 여의주와 유사한 의미와 기능으로써 변신의 귀재 여우에게도 신묘한 구슬이 짝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여의주보’는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다고 여기는 보배로운 구슬을 의미한다.3) 여의주는 민중들을 정신적인 번뇌와 세속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공덕과 신통력을 가진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화적·종교적 상상력의 신물이 세속의 세계에서는 천하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신비한 구슬로 인식되었고, 용의 여의주가 절대 왕권을 상징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우의 구슬은 용의 구슬만큼 정형화되지 않았지만, 원하는 바를 이룸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변신하게 하는 여의주보의 기본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 구미래, 「여의주보」,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여우 구슬로 보여 주는 인간 욕망의 모습과 그 한계


인간이 여우 구슬을 획득함에 따라 인간도 새로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 이때 인간은 다른 형상을 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탁월한 인물로 변신한다. 인간이 만약 자신의 존재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변신한다면 그 극점은 ‘왕’이나 ‘신(神)’으로의 변신일 것이다. 한국의 신화는 크게 왕이 아닌 자가 왕으로 변신한 이야기와 신이 아닌 자가 신으로 변신한 이야기로 양분할 수 있다. 전자가 새로운 왕국의 시조 왕의 이야기인 건국 신화, 후자가 우리 민간의 무속 신앙 체계 속에서 좌정(坐定)한 신의 이야기인 무속 신화인 것이다. 그런 데 <여우 구슬> 설화의 지향점은 신화의 성스러운 상상력이 아니라 세속적 상상력에 있다. 만약 여우 구슬을 삼킨 소년이 인간, 땅, 하늘을 모두 보았다면, 적어도 하늘을 보고 하늘의 이치를 통달했다면 그는 왕이나 신이 되지 않았을까? 

<여우 구슬> 설화는 여우가 갖는 신묘한 능력을 구슬로 응축시키고, 그 구슬을 인간이 획득했을 때 얻게 되는 초월적 능력 내지 천운을 표현하고 있다. 여우가 비록 신성의 존재로 수용되지는 않고 인간을 해치는 요괴의 존재로서 부정되지만, 인간에게 있어 온전히 파악되고 수용되지 않는 여우의 불완전성은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넘어서는 힘을 가진 존재로 상상된다. 인간이 현실에서 쉽게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이 여우의 구슬을 통해 성취되기를 바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은 인간의 현실과 완전히 괴리되거나 탈인간적 차원으로 옮아 가 버리지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공부하는 소년, 즉 아직 미완성의 인물이며 향후 무엇인가로 성장, 변신해야 하는 가능태의 단계에 있는 존재이다. 이 소년이 성적 환상과 유혹을 극복하고 미지의 존재를 인식해 획득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 혹은 행운의 최대치는 결국 지상적인 것, 인간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인간 욕망을 여우의 구슬로 응축시킨 이 이야기는 인간의 변신에 대한 욕망과 함께 그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우 구슬은 어떻게 상상되고 표현되는가?


한국인의 설화에 나타나는 여우 구슬에 대한 상상력은 현재에도 여전히 소환되고 새롭게 재해 석·재구성되고 있다. 구미호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각종 영상 콘텐츠에서 재탄생했는데, 이때 항상 여우 구슬이 등장해 인간의 욕망과 환상적 상상력을 형상화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여우 캐릭터는 주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으나 인간에게 배신당하는 비련의 존재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는 구미호가 남성으로 설정되기도 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신이(神異)한 존재로서 현대의 인간 세계에서 인간과 공존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여우 구슬은 이러한 여우의 능력이나 정체성을 대표하는 주물로 사용되며 막강한 힘이나 주술적 능력, 부나 권력, 나아가 사랑의 증표로, 인간의 욕망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 


드라마 &amp;lt;구미호뎐&amp;gt; 중, 2020년 | tvN
드라마 <구미호뎐> 중, 2020년 |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