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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근대 역사 산책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현재적 의미를 재조명해야 할 그날, '11월 19일'
11월 19일은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지난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국 사이에 을사조약이 맺어진 날이다. 조선의 외교권을 일제가 박탈하고 상 위 행정기구로서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조약의 골자였다.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맺어진 것은 5년 뒤인 1910년이었으나,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으로 이미 국제사회에서 ‘지워진 나라’였다. 한국인들에겐 어두운 역사로 여겨 졌던 만큼 그 현장도 자연스레 잊혀갔다.
01_복구된 중명전 외관(사진제공_문화유산국민신탁
02_복구 전 중명전 지하
03_복구 전 중명전 벽난로
중명전에서 만난 다크 헤리티지의 아픔
을사조약의 현장인 서울 정동의 중명전이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 것
도 하등 이상한 광경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
럽 등으로 쓰이다 광복 뒤에는 일본에서 영구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거처로 잠시 제공되기도 했으나, 1976년 민간에 매각된 뒤에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듯했다.
지난 2003년 무렵 중명전을 처음 목격했을 때의 느낌은 처량함 그 자
체였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임에도 길가에
‘중명전’ 안내판 하나 없이 ‘정동극장 주차장’이라 쓴 간판이 전부였다.
중명전 마당을 정동극장의 유료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건물 역시 한없이 허름했다. 주차장 너머에 있는 지상 2층, 지하 1층짜
리 벽돌조 건물이 중명전이었는데, 바로 뒤에 콘크리트 건물까지 덧대
있어서인지 더 애달프게 느껴졌다. 외벽에 칠해진 흰색 페인트는 심하
게 풍화되어 각질처럼 조각조각 떨어지고 있었고, 여기저기 박혀 있는
쇠못은 건물의 부식을 촉진하고 있었다. 내부는 더 가관이었다. 신문
지와 종이 상자 등 각종 쓰레기에 소주병까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칸
막이 용도로 아무렇게나 설치한 벽은 중명전의 원래 모습을 헤아리기
힘들게 했다. 곰팡이가 잔뜩 슨 퀴퀴한 지하실은 더 처참했다. 벽면은
너덜너덜했고 기둥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복잡하
게 엉킨 전선들은 비라도 많이 내리면 누전으로 인한 화재까지 염려해
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한국사회가 그런 홀대를 계속 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즈음 서울시가 ‘중명전과 그 땅을 매입해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사
전시시설로 이용하겠다’며 서울시의회에 ‘시유재산 관리계획 변경안’
을 냈고, 시의회는 바로 의결 처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매입과 보수
에 1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필요한 것으로 조사되자 변경안을 냈던 서
울시가 그 계획을 자진 철회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2010년, 중
명전이 ‘붕괴 직전’ 수준으로까지 망가진 시점에 이르러서야 중명전 복
구사업을 마치고 일반 공개가 시작됐다.
상황이 바뀐 것은 시민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관심 때문이었다. 제
아무리 어두운, 부정적인 역사의 현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에 미
치는 역사적 울림이 크다면, 특히 교훈을 주는 현장이나 대상이라면 그
역시 존재가치가 확실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정부도 화답했다. 식민
지 시대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이 자칫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여지가 있
었기에 정부가 직접 나서기보다는 특수법인을 설립해 민간의 참여를
독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중명전 복구보다 몇 년 앞서 탄생한
단체가 ‘문화유산국민신탁’이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중명전을 성공리에 복구, 개방한 이후에는 울릉
도 도동항 근처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벌목업자의 목조건
물을 비롯해 전남 보성 벌교에 있는 보성여관, 부산 수정동에 있는 일
본식 가옥 등을 매입해 역시 재단장을 거쳐 시민에게 공개해오고 있다.
공통점은 모두 작은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곳에 이런
건물이 들어섰는지 그 내력을 풀어주고 있는데, 전시관을 둘러보노라
면 앞으로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슨 관심을 어
떻게 기울여야 할지 성찰적 사고를 확장하게 한다.
경복궁 안내도의 유독 새하얀 글자
비슷한 공간은 또 있다. 경복궁의 가장 안쪽, 사람들의 발걸음이 잘 닿
지 않는 곳에 석축 한 개가 우두커니 서 있다. 일제강점 초기 원래 자리
에서 뜯겨 일본으로 발출됐다가 지난 1995년에야 돌아온 자선당 석축
이다. 이 땅을 떠난 지 근 80년 만의 일이었다.
목조 건축물은 해체한 뒤 재조립할 수 있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 짓는
경우가 더러 있다. 왕세자가 거처했던 자선당의 경우엔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고 5년 정도 지났을 때 해체됐다. 시정 5년 기념, 즉 일제
가 조선을 통치한 지 5년이 된 것을 기념해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란
이름의 박람회를 구실로 삼았다. 전시공간을 마련한다며 자선당을 비
롯해 흥례문과 시강원 등 4,000여 칸에 이르는 전각들을 헐어버린 것
이다.
이때 철거된 건물 중 상당수는 서울 용산과 필동에 있던 일본 사찰이나
요정 등으로 팔려나갔다. 일부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도 반출됐는데,
도쿄경제대학을 설립했을 정도로 대부호이자 훗날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건설사를 운영했던 오쿠라 키하치로에 의해 도쿄로 옮겨진 자선
당이 대표적인 예다. 오쿠라는 자선당을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자신의
박물관이자 일본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오쿠라 슈코칸’으로 옮겨 부속
건물로 삼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자선당의 거의 모든 부분이 불에
타고 만다. 남은 것은 석축뿐. 그 후 70여 년 동안 방치돼 있다가 김정동
전 목원대 교수의 눈에 띄면서, 오랜 협상 끝에 오쿠라재단이 삼성문화
재단에 기증하는 형태로 288개 조각으로 이뤄진 기단부가 돌아온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경복궁에 간들 자유로이 자선당 유구를 볼 수
는 없었다. 주요 전각이 일본으로까지 팔려 갔다 돌아온 사실을 알리기
가 썩 내키지 않았고, 한 많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자선
당 석축이 입은 상처도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 테다. 실제로 석축은 화
재 당시 고열에 노출되어 석질이 푸석푸석해진 데다 균열도 심하고 깨
진 부분이 많다. 훼손이 심한 나머지 1999년 진행된 자선당 복구사업
에도 활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엔 지금처럼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건청궁에서도 제일 안쪽에 놓였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려져 있었다.
자선당 유구가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한 것도 중명전이 되살아날 때쯤
이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자긍심이 회복되면
서 이른바 다크 헤리티지(부정적 문화유산)에 대한 시각이 서서히 바
뀌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흥례문과 금천교 사이에 철로 된 회
색 안내도가 하나 서 있는데, 유독 자선당이란 세 글자만 흰색으로 선
명하다. 처음 안내판을 만들 때는 넣지 않았다가 나중에 새겨넣은 탓이
다. 어두운 역사유산에 대한 입장 변화, 역사의 명암을 두루 살핌으로
써 더 나은 내일을 그려보기 위한 한국 사회의 품과 깊이가 그만큼 넓
어지고 깊어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시민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근대문화유산
이런 흐름의 변화는 정부나 지자체만 주도하는 게 아니다. 정부로부터
의 간섭과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순수 비영리 민간단체로서 멸실
위기에 처해 있던 최순우 옛집을 지켜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의 옛집과
조각가 권진규의 아뜰리에 등을 운영해온 데 이어 그동안 한국 사회가
놓쳐온 자연 유산의 발굴과 보존에도 힘을 쏟고 있다.
개인들의 관심과 노력, 참여도 무시할 수 없다. 한양도성을 시민들과
함께 걸으며 무료 안내를 해주고 있는 수백 명의 ‘도성길라잡이’들, 5대
궁궐을 비롯해 사직단과 종묘 등에 대한 역사 무료 해설 자원봉사를 해
오고 있는 ‘궁궐길라잡이’와 ‘궁궐지킴이’들. 이들은 자발적으로 시간
을 쪼개 역사와 공간, 인물을 학습하고, 그걸 토대로 다른 시민에게 발
견의 기쁨과 앎의 의미를 전수해오고 있다. 그 기간만 20여 년째, 수혜
인원만 매해 20만 명에 가깝다.
앞서 이야기한 ‘11월 19일’은 의미심장하다. 이날은 불법적으로 을사
조약이 체결된 날이지만,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이 이
날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한 날이기
도 하다. 광복 이후인 오늘날까지도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기
리는 ‘순국선열의 날’로 각종 행사를 이어오고 있는 11월 19일. 날은 한
날이지만 의미는 다른 그날, 다크 헤리티지가 지닌 현재적 가치를 되
새겨보자.
04_자선당 유구 전경
05_자선당 유구의 불에 그을린 흔적
06_혜곡 최순우 옛집에서 열린 문화행사
07_춘곡 고희동 가옥 실내
08_춘곡 고희동 가옥 전경
-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