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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우리 문화의 뿌리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선행을 큰 즐거움(爲善最樂)으로, 전통교육의 불씨를 살려온 보성 선씨 선영홍 종가
나누는 삶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다는 위선최락(爲善最樂)을 몸소 실천해온 선영홍 종가. 일제 강점기, 민족교육에 누구보다 열성적인 마음으로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좋은 본을 받는다’는 의미를 담아 서당 관선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수많은 어려운 청 년들이 무료로 배움을 이어갈 수 있게 배려하는 선행과 더불어,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 하는 정성 어린 책거리상도 잊지 않았다.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지만, 선영홍 종가의 따스한 마음은 더욱 짙어지며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전통교육의 큰 터전, 관선정
예나 지금이나 교육은 한국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선교사의 눈에 띈 것은 서당풍습과 각 가정의 책들이었다. “조선인
은 끼니도 벅찬데 무슨 책과 공부인가?”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
(文)을 숭상하여 온 나라가 과거에 매달린 풍습은 오늘날에도 극과 극
의 평가를 받는다. 다만, 교육중시의 풍토는 신문화와 기술 수용에 획기
적 저력을 발휘하여 산업화의 막차를 타게 해주었다. 청주~상주 간 고
속도로 속리산 톨게이트에서 1km 남짓한 장안면사무소 건너 솔숲 안쪽
이 중요민속자료 134호 선영홍 종가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삼가천이 흐
르는 아름다운 집이라 하여 ’아당골‘로 불린다. 선영홍 종가는 20세기 초
암울한 시대에도 전통교육에 힘써온 대표 집안이다.
고려 때 선윤지를 시조로 한 선씨 종가는 현 종손인 선민혁(宣民赫)의 증
조부 선영홍(宣永鴻)대인 1903년에 전남 고흥에서 현 충북 보은군 장안
면 개안리로 옮겨왔다. 이후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아들 선정훈(宣政
薰)과 함께 종택을 건립했다. 사랑채와 안채, 사당을 감싸는 각각 독립된
담장 밖으로 전체를 아우르는 외곽 담이 추가되어 단절과 융합의 지혜가
돋보인다.
선영홍 종택이 교육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현 종손의 고조부인 선처흠(宣
處欽) 대이다. 선처흠은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했다. 보은의 종택이건을 마무리한 선정훈은 지역민을 위한 교육사
업으로 신임을 얻었다. 선정훈 공덕비에 “학문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
하니, 대대로 내려오는 공덕일세,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고 전한다.
이 기록은 일제강점기 어렵고 각박한 시절, 선을 베푼 선영홍 종가의 미
덕을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교육으로 베푼 고마움은 수혜를 입은 당사
자들의 기록인 1973년 관선정기적비(觀善亭記蹟碑)를 통해서도 확인된
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학생들이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창립하여 비를
세운 것이다. 관선정은 보은의 새 종택 동편에 세운 서당이다. 보은 향교
에도 서숙(書塾)을 설치하여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보은의 두 교육기관은 1926년부터 일제에 의해 폐쇄되는 1941년까지 영
남에서 홍치유(洪致裕) 선생을 모셔와 후학을 양성했다. 이곳을 거쳐 간
인물로는 한학자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선생이 대표적이다. 임창순
선생은 이후 태동고전연구소를 중심으로 고전번역과 강학, 서예 등 다양
한 활동으로 전통단절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1981년 한국의집 개관 당시 본관 주련과 1988년 지은 녹음정(綠吟亭), 청
우정(廳雨亭) 현판을 비롯하여 1998년 경복궁 흥례문 상량문 등이 남아
있다.
01_선영홍 종가
02_선영홍 종가_김정옥 종부
03, 04_선영홍 종가 가을 풍경
(사진제공_농촌진흥청)
선영홍 종가 책거리상의 탄생
선영홍 종가는 몇 년 전까지도 관선정의 전통을 이어 고시원을 운영, 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거쳐 갔다. 자연스레 종가음식은 교육 관련 방향으로
발전됐다. 전라도 광주 출신의 김정옥 종부는 선영홍 종가음식의 특징으
로 지역적 다채로움을 꼽는다. “종가에 며느리가 들어오면 다른 지역 음식
이 더해져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져요. 저희 시할머니는 서울 분이고 시증
조할머니는 전라도 분이셨거든요. 지금 종가는 충청도에 있으니 자연스레
우리 집안 음식은 여러 지역 색깔이 섞인 거죠.”
지금도 관선정 시절의 음식 맛을 보고자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 2006년 10월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서 처음 세상에 이름
을 알린 350년 덧 간장을 기반으로 한 종가음식의 풍미를 찾는 손님들이
다. 현재 선영홍 종가의 덧 간장에 풍미를 더한 ‘아당골 된장’이 종가음식
산업화의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선영홍 종가의 대표음식은 책거리상을 구성하는 찬품들이다. “1941년 관
선정이 폐쇄되기 전까지 한 달에 두어 번,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뗄 때마다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작은 잔치가 열렸어요.” 종부는 최근 시할머니
께 들은 기억으로 책거리상을 복원했다.
책거리상은 민어부레순대를 중심으로 볶은 소고기와 황백지단을 고명
으로 올린 청포묵, 으깬 두부를 넣어 빚은 소고기 완자탕, 대하와 버섯을
넣은 새우전, 간장에 간을 맞춘 나박김치, 파강회, 육회와 갈비찜, 송편
은 물론 소고기 우둔살로 만든 육포와 생강을 조린 편강에 약술이 더해
진다. 서울과 충청도, 전라도의 음식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상차림이다.
선영홍 종가 책거리상 가운데 가장 특별한 음식은 민어부레순대다. 『신
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 백성 민(民)자를 써서 ‘민어
(民魚)’라 기록되었을 정도로 흔한 백성의 물고기였다. 몸집이 큰 민어
부위 중에 가장 으뜸이 공기주머니인 부레다. ‘민어가 천 냥이면 부레가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듯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의 질감과 갖은 양념한
순대 넹소가 어우러져 쫄깃하며 깊은 맛을 더 한다. 김정옥 종부의 민어
부레순대를 한번 맛본 이들은 잊지 못하고 다시 찾을 만큼 인상적이다.
책거리상 위 가장 특별한 요리가 민어부레순대라면, 가장 많이 올라가
는 식재료는 소고기다. 농업사회인 조선에서 소는 귀한 존재였지만, 선
비들은 유난히 소고기에 집착이 강했다. 세종의 경우 고기반찬이 없으면
식사를 못 할 정도였다니, 심지어 도살을 금지하는 상황에서도 소고기
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된 집단이 성균관 유생들이다. 장차 과거
를 통해 국가경영에 참여할 예비 관료에 대한 배려다. 공부에 지친 유생
들이 소고기로 몸과 마음을 달래도록 특별히 허락한 경우다. 책거리상에
등장하는 육회와 갈비찜, 소고기완자탕은 이런 전통을 반영한 예다.
한편, 책거리상에 오른 송편은 속이 비었다. 속이 없는 송편을 한 입 깨물
면 펑 하고 터지는 느낌인데, 학동의 지혜와 앞날이 송편처럼 시원하게
뚫리라는 바람을 담았다. 이러한 상징과 의미는 강릉의 창녕 조씨 종가
에서 사위 첫 생일상에 ‘태극 모양의 떡’을 올려 나라의 큰 일꾼 역할을 기
원하거나, 대구 경주 최씨 종가에서 둥근 형태의 ‘태양떡국’으로 기운 생
동한 삶을 염원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상징과 의미는 책거리상에 오르는 새우전에도 담겨있다. 『본초강
목』에 ‘혼자 여행할 때는 새우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새우가 양기에 좋은
강장식품인 때문일 것이다. 한여름 동안 후학 양성과 학업에 힘쓴 훈장
과 학생들에게 한 달에 두어 번 찾아오는 책거리상의 새우전은 맛과 영양
에 있어 더 할 바 없는 보양음식이었을 것이다.
선영홍 종가와 한국의집 음식을 융합, 수험생을 위한 특선 기대
문화재청은 최근 ‘신 보물 납시었네’ 특별전에서 신화장구지(新花長舊枝),
즉 ‘새 꽃은 묵은 가지에서 나온다’라는 글귀로 문화유산의 뜻을 압축 강
조했다. 한국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 선생은 “함께 할 수 없는 아름다
움은 때로 아픔이 된다-중략-체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전통이란 바로 자기 자신, 그것
입니다”라고 전통문화 계승의 소중함을 일러주었다.
전통을 현 생활에 끌어와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면 활용성은 배가 된다.
한국의집은 전통이 암울하던 지난 40년간 궁중과 양반가 등 전통음식을
활용, 성공적으로 산업화한 대표 사례다. 입시철을 앞둔 요즈음 선영홍
종가의 ‘책거리상’을 한국의집에서 재현하면 어떨까?
한국의집은 지난 8월 마켓컬리를 통해 조선 최초의 배달음식인 효종갱
을 선보여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한국을 이끌어갈 수험생을
둔 가정에서 종가의 책거리상을 재현할 수 있도록 조리법을 공개하고,
종부의 미각으로 재현된 책거리 음식을 배달 서비스하는 것이다.
묵은 가지에서 꽃이 돋아나듯 전통음식의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내다보
고 국민이 체득하는 식문화 확산을 기대해 본다.
05_선영홍 종가의 상징이 된 현판
06_선영홍 종가 책거리상
07_보은의 상징이 된 대추차
08_책거리상에 오른 곶감말이
09_책거리상에 오른 속이 빈 송편
- 글. 안태욱(한국문화재재단 미래전략기획단장) 음식사진. 주병수(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