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근대 역사 산책
글. 권기봉(작가 역사여행가)
110년 전 경술국치의 현장 속으로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0년 8월 29일, 서울 남산에서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됐다. 한국인 가운데 그 일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 국가가 변변한 전쟁 한번 없이 조약을 통해 소멸해간 세계 사상 전대미문의 그 희한한 사건이 어디서 벌어졌는지로 질문을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는 이가 없었다. 한국통감 관저에서 체결되었음은 알려져 있었으나, 정작 통감 관저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탓이다.
01_숭례문 쪽에서 밀레니엄힐튼서울호텔로 올라가는 길로,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참도 풍경
02_노기신사 터에 남아있는 석등 유구
03_국가 차원의 신궁이었음을 알려주는 '관폐대사 조선신궁_ 표석
04_철근콘크리트조의 박문사 본전
남산에 들어선 신궁과 신사 그리고 박문사
우리 국토 중 그렇지 않은 곳이 없지만, 서울 남산은 그야말로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한눈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재 발굴작업 중인 조선신궁(朝鮮神宮)과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인 박문사(博文寺)와 나아가 정신적 차원의 통치 시설들이다.
식민지 수도 한복판에 조선신궁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20년대 중반의 일이다. 천황가의 시조라 여겨지는 신화 속 인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살아있는 천황인 메이지(明治)를 제신으로 삼았다. 일반적인 신사들과 달리 정부 자금으로 운영했는데, 신사 중에서도 격이 높은 신궁은 당시 일본 본토를 통틀어도 15개 밖에 없던 실정이었으니 조선신궁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의 식민지 가운데 신사가 아닌 신궁으로서 유일하기도 했다. 규모도 남달라 43만㎡의 광대한 면적을 자랑했다.남산에 들어선 것이 조선신궁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리라초등학교 뒤에 있던 노기신사(乃木神社)와 해방촌 일대에 있던 호국신사(護國神社) 등은 군국주의 총본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기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전쟁의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기리기 위한 신사였고, 호국신사는 전몰장병을 천황을 위해 죽은 군인이라 모시던 작은 규모의 야스쿠니신사 격이었다.
박문사 역시 간단치 않은 곳이었다. 현재 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는 남산 자락의 이름이 ‘춘무산(春畝山)’으로 바뀌고 거기에 ‘박문사’라는 사찰이 들어선 것은 지난 1932년 10월 26일의 일이다. 춘무산의 춘무와 박문사의 박문은 모두 이토 히로부미를 가리킨다. 정문부터 여느 호텔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쏙 빼닮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23번째 기일을 맞아 박문사를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쓰려고 아예 흥화문을 떼어왔던 것이다.
박문사가 들어선 곳은 원래 장충단이 있던 곳이다. 장충단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죽은 조선 군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제단이다. 그랬던 곳을 일제가 벚나무를 심으면에서 발견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의 동상 좌대는 심증을 사실로 확신케 하는 발견이었다. 통감 관저 앞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점 등을 기려 하야시의 동상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었기 때문이다.
2005년에야 알려진 경술국치의 현장
광복 뒤 박문사는 헐렸고, 본전이 있던 곳 바로 옆 바위에 일제의 기를 누른다며 ‘民族中興(민족중흥)’이라 새김으로써 또 한번의 상징 전복이 가해졌다. 제 자리를 떠나온 흥화문도 지난 1988년 원래의 경희궁으로 다시 옮기면서 지금은 그것을 본뜬 새 문이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상태다.그나마 이 공간들은 유구가 존재하거나 관련 기록이라도 있어 그 내력을 일정 부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경술국치의 현장은 지난 2005년 이맘때 이순우 현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정확한 위치를 비정해낼 때까지 누구도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이완용이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의 통감 관저로 조약문을 가져가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있었을 뿐 정작 그 관저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日本之朝鮮[일본의 조선]<을 보면 통감 관저의 전경을 촬영한 사진이 한 장 실려 있는데, 거기 보면 진입로 모습이 지금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가 말한 진입로는 통감 관저로 들어가는 길로, 이 책임연구원이 1911년 1월 1일 일본에서 발행된 <사진화보그래픽>의 특별 증간호 <일본의 조선>을 비롯하여 여러 자료와 무수한 답사를 통해 찾아낸 경술국치의 현장은 다름 아닌 서울 남산에 있던 옛 TBS 교통방송 사옥에서 지금의 서울 유스호스텔로 향하는 언덕길 위 공터였다.
실제로 찾아가 보면 당시 사진에 나오는 진입로 옆 나무들의 위치가 지금까지도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2006년 2월 그 근처에서 발견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공사의 동상 좌대는 심증을 사실로 확신케 하는 발견이었다. 통감 관저 앞에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점 등을 기려 하야시의 동상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었기 때문이다.
100년 만에 세워진 표석, 뒤따른 반론
왜 우리 사회는 그 오랜 기간 경술국치의 현장을 모르고 있던 것일까? 관저는 지난 1939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해갈 때까지 한국통감 관저에 이어 조선총독 관저로 이용됐다. 해방 뒤에도 철거되지 않고 부속 시설들과 함께 1946년 민족박물관, 1953년 국립박물관, 1954년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쓰였다.
상황이 바뀐 것은 박정희 정권부터였다. 관저 터 주변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부수어 버린 것이다. 이후 1990년대 중반 서울 내곡동으로 청사를 신축 이전해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마저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가 없어 해방 뒤 60년이 흐르도록 5백 년 역사의 나라가 망한 장소는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발견이 있기 전까지 베일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역사에 대한, 특히 부정적인 의미의 역사 유산에 대한 몰이해가 낳은 당황스러운 결과다.
결국 한국통감 관저가 있던 곳으로서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맺어진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석이 설치된 것은 경술국치로부터 꼭 100년만인 지난 2010년 8월 29일이었다. 그것도 정부나 지자체 같은 공공기관이 아니라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서였다.
그래서였을까? 표석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부정적인 역사의 현장을 알아낸 것까지는 좋은데 굳이 그 사실을 알리는 표석을 세우는 게 필요하냐는 반론이 뒤따랐다. 앞만 보고 미래로 나아가야지 자꾸 뒤를 돌아봐서 무엇 하냐는 힐난도 이어졌다. 실제로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글씨를 기반으로 시민 모금을 통해 세운 표석은 당국의 허가가 없는 불법 건조물이라는 오명을 쓰고 오랜 기간 철거와 존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될 정도였다.
통감 관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좌대라고 해서 긍정적인 관심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수년 동안이나 관저 터의 한쪽에 일렬로 눕혀놓고 야외 벤치로 이용됐다
지난날의 성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떠할까? 지난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방치해왔던 하야시의 동상 좌대를 곧추세웠다. 일부러 “거꾸로 세워 욕스러움을 기린다”라고 적은 건립문 내용이 주술적이면서도 유아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기는 하나, 그래도 부정적인 역사 유산을 통해 이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환기하려는 의지는 전에 없던 변화다. 더욱이 이듬해 경술국치일에는 동상 좌대 바로 옆에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알리는 ‘기억의 터’라는 조형물을 만들어 세우면서 인권과 정의의 의미에 대해 되새겨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와 문화재를 대할 때 긍정적인 것은 취하고 부정적인 것은 지양하기만 한다면 성찰의 시간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소 어두울 수도 있지만 도리어 이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한 네거티브 유산이 지니는 현재적 가치는 나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게 하는, 즉 성찰과 반성의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데 있다. 나아가 비슷한 상황의 재발을 막고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보려는 사고의 여유는 바로 이 부정적인 역사 유산이 지닌 현재적 존재 이유 중 하나다.
아직은 찾는 이가 많지 않은 통감 관저 터의 숨겨진 이야기. 110년 전 경술국치의 현장을 찾아 그동안 외면해온 역사와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05_경희궁 정문 흥화문을 본따 새로 지은 신라호텔 정문
06_'일본의 오늘'에 실린 통감 관저
07_ 통감 관저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
08_ 방치돼 벤치처럼 쓰이던 하야시 동상 좌대 중 하야시 곤스케 성명 석각
09_ 일부러 위아래를 바꿔 세운 하야시 곤스케 동상 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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