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기획특집 2
수행의 길
글.사진.유성문(여행작가)
얼핏 물소리에 잠이 깬 것 같았다. 새벽 4시. 태화산 마곡사의 아침은 도량석으로 이미 열렸으련만 행자에게 대광보전으로 가는 길은 칠흑 그 자체였다. 그 어둠 속에 어떤 무명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까. 고요를 가르는 목탁소리는 깨어있으라, 깨어있으라 자꾸만 미망을 두드리고 있었다. 모든 번뇌를 떨치고 홀연 깨어날 때까지. 무소의 뿔처럼 홀로 일어설 때까지, 마곡사 템플스테이 이틀째 아침은 그렇게 무명을 깨우는 새벽예불로 시작되었다.
길에서 또 어떤 길을 물으랴 수행의 길
떠나기 위한 머무름, 템플스테이
이번 마곡사 템플스테이에는 모두 14명의 행자가 참여했다. 세간에 밀어닥친 코로나19로 산문은 조심스레 행자들을 받아들였고, 그 파고에 지친 몸을 잠시 내려놓으러 온 행자들의 마음가짐 또한 새삼 각별한 듯 보였다. 삶이 이미 수행의 길임에야 이 잠시의 머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우리 전통문화의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시작된 템플스테이는 1,600년 한국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산사에서 수행자의 일상을 경험하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당일형, 체험형, 휴식형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숙 여부나 목적에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보통 사찰안내, 참선과 명상, 예불과 발우공양, 스님과의 차담 등으로 이루어지며, 사찰에 따라 연등·염주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갖기도 한다. 템플스테이는 잠시의 머무름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참 가치를 만나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천년고찰 마곡사 일원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혔을 만큼 절경을 자랑한다. 약 5km 구간의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걷고 태화산의 맑은 숨결을 느끼는 코스에는 ‘수리수리 숲소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중 영산전 뒤로 옛 세조가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라 불렀던 군왕대 오르는 길은 트레킹 수행의 절정을 이룬다. 행자들은 스님을 따라 산길을 오르며 명상하고, 스님과 또 자신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위로를 얻는다. 그 포행길에서 만난 작은 풀꽃 하나는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 장엄하다.이틀간의 템플스테이는 스님과의 차담으로 마무리된다. 따뜻한 보이차 한잔을 마시며 여기 산문에 이르게 된 인연을 이야기하고, 그동안 억눌러왔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태정스님은 자신 또한 번뇌와 고행의 길을 걸어왔음을 이야기하고 위로를 건넨다. 출가 후 회의와 번민에 휩싸여 있을 때 상좌스님이 들려주었던 말씀까지 덧붙인다. 살아보라고, 그냥 살아보라고 했단다. 어쩌면 모두가 스스로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겨내지 못할 뿐. 삶이 이미 수행의 길이거늘 그 길 위에서 또 어떤 길을 물으랴.
“마곡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연경관에 감동하고, 고즈넉한 사찰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따뜻하게 맞이해주시는 스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와 마곡사의 역사를 들으면서 또 다른 마곡사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예불 전 생전 처음 타종을 경험하게 되어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겼습니다. 저녁, 새벽 조용한 절에서 온전히 나만을 바라보며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템플스테이의 큰 매력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그저 조금 쉬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얻어가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라고 어느 행자가 소회를 들려주었다.
01_ 마곡사 대광보전에서의 새벽예불
02_ 송광사 약사전과 영산전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마곡사는 해동의 제일가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마곡사 사적입안의 기록에 따르면 640년(백제 무왕 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이 절에 들러 ‘영산전’이란 사액을 한 일도 있다. 현재 마곡사는 대웅보전을 비롯한 대광보전, 영산전, 사천왕문, 해탈문 등의 전각들이 가람을 이루고 있다. 이밖에 5층석탑과 범종, 괘불 1폭, 목패,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법연화경 제6권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이 보존되어 있다.
마곡사의 문화유산들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통2층으로 된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전각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이 네 개 있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사람이 죽어 저승의 염라대왕 앞에 가면 ‘그대는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많이 돌수록 극락길이 가깝기 때문. 아예 돌지 않았다고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에는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 전설이 담겨 있다. 부처님께 공양할 삿자리를 짜면서 100일 동안 기도를 올린 앉은뱅이가 마침내 업장이 소멸하면서 대광보전을 스스로 걸어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 선생과 깊은 인연을 이어온다. 1898년 가을, 23세의 청년 백범은 마곡사에서 삭발하고 출가한다.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 단순한 출세간의 길이 아니었다. 이태 전 백범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나루에서 쓰치다라는 일본군 장교를 살해했다. 명성황후가 왜놈들의 손에 무참하게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복수를 결심하던 차에, 조선인으로 변복을 하고 품에 칼을 숨기고 있던 쓰치다를 발견하고 그를 시해사건에 가담한 자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던 백범은 목숨을 걸고 탈옥을 감행하여 삼남 일대를 떠돌던 끝에 마침내 마곡사에 이르렀다.
마곡사에는 백범이 머물렀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가 출가했던 곳에는 ‘백범당(白凡堂)’이 재현되어 있고, 최근에는 그가 머리를 깎은 삭발터와 조선 세조가 명당이라고 감탄했던 군왕대를 거치는 3km 구간에 ‘백범명상길’이 조성되었다. ‘백범명상길’은 영은암, 은적암을 거쳐 그가 기거하던 백련암까지 이어진다. 또 백범당 옆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백범이 해방 후 마곡사에 다시 와서 대광보전 주련에 새겨져 있는 ‘돌아와 세상을 보니 모든 일이 꿈만 같구나(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글귀를 보고 감개무량하며 심은 것이라 한다. 그가 흉탄에 이승을 하직한 후 49재를 봉행한 곳도 바로 마곡사였다.
백범당에는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걸려 있는데, 조선후기 문인 이양연의 야설(夜雪)이란 시다.
눈 덮인 들판을 밟고 갈 적에
어지러이 걸어선 아니 되겠지.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을
뒷사람이 그대로 따를 테니까.
아홉 개 명찰과 함께하는 ‘수행의 길’
<문화유산 방문 캠페인> 9개 루트 중 ‘수행의 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마곡사, 법주사, 대흥사, 선암사, 통도사, 부석사와 봉정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송광사 등 아홉 개 명찰로 설정되었다. 불보사찰인 통도사와 함께 해인사는 법보사찰,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한국불교의 ‘삼보(三寶)’를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이때부터 꽃피운 한국불교는 사회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찰은 평지에 세워지기도 했지만, 산지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산속에 있는 사찰을 ‘산사(山寺)’라고 하며, 오늘날까지도 유·무형의 문화적 전통이 지속되어온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불가에서 ‘수행(修行)’은 오로지 한 생각에만 집중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을 일컫는다. 그 수행의 터인 절은 우리 전통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세파에 찌든 심신을 잠시 쉬고자 하는 이라면 그저 말없이 절을 둘러보는 것으로 그만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건물은 왜 여기 이런 이름으로 있으며 저 탑은 왜 저기 저런 모양으로 있는지를 안다면 절을 보는 느낌은 사뭇 달라지리라.
03_ 템플스테이 안내
04_ 송광사 임경당과 우화각
-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