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소식
국유정담
전통문화 기반 조성을 위한 40년의 발자취.
글. 박영우[사사(社史)작가]
40년의 다짐, 40년의 영광
1980년 4월 태동한 한국문화재재단은 수많은 최초와 최고의 기록을 만들며 대한민국 문화지킴이로 성장했다. 국민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해 온 재단
직원들의 무수한 다짐과 값진 노력이 한국문화재재단을 만든 근간이 되었다. 이제 지나온 영광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최초와 최고를 향해 한 단계 도약하고자 한다.
한국문화재재단은 지난 40년 그리고 미래 40년을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가 세계 속에 더 깊이 향유될 수 있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설립기(1980년대)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서 아름다운 시작
한국문화재재단은 1980년 4월 1일 한국문화재보호협회로 설립·발족됐다. 단체 성격은 재단법인으로 발족하되, 향후 「문화재보호법」에 설립 근거를 명문화하여 특수법인으로 전환하고, 지방기구 설치는 각 지역 실정과 재정 사정에 따라 중앙기구 발족 이후 단계적으로 설치·운영하도록 했다.
이에 앞서 1980년 3월 28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관 리단체 통합준비위원회를 발족해 재단법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의 정관(안)을 심의·결정하고 발기인을 선임했다. 발기인으로는 장관이 임명한 박종국(초대 이사장), 오세백(상임이사), 이영근(상임감사)을 비롯하여 강주진(당시 성균관장), 예용해(당시 문화재위원), 성경린(당시 종묘제례악보유자), 김영권(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 김석룡(당시 문화재관리국장)이었다.
재원은 사단법인 한국문화재보호협회 적립금 4천만 원, 재단법인 한국 무형문화재보호협회 기금 3천만 원 등 총 7천만 원이었다.
3개 부서 임직원 23명, 예산 2억 6천만 원 규모로 출발한 한국문화재재단의 시작은 비록 보잘것없이 보였을지 몰라도 그 역할만큼은 아주 컸다.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등한시되었던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서의 임무가 가장 먼저 부과됐다. 특히 혼란한 사회상과 문화의식이 부족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문화재 보호, 보존, 보급 및 활용과 전통생활문화의 창조적 계발이라는 공익 목적으로 새롭게 출범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전통문화 보급 확산의 초석을 다지다
출범과 함께 한국문화재재단은 공익 목적에 맞는 사업을 찾는 것과 재정 안정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았다. 초창기에는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이관 받은 중요무형문화재 마당종목·무대종목 발표공연과 전승공예대전을 중심으로 정부사업 대행과 문화재 보호운동을 중점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해외공보관에서 외국인 접객용으로만 사용하던 ‘한국의집’을 1981년 2월 새롭게 문을 열고 재단이 수탁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의집 수탁은 재단이 기존 해오던 무형문화재 관련 사업에 문화시설 수탁 관리라는 사업을 더하는 큰 전환점이 됐다. 재정 자립의 초석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재단의 재정 안정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됐다.
1981년 재단은 『한국전통음악대전집』 출반과 함께 『한국고궁』, 『한국악기』, 『중요무형문화재해설』, 『탈춤대사집』 등을 잇따라 출간하면서 그 존재가치를 증명했다. 1982년 3월에는 우리 고유 전통혼례를 한국의집에서 치렀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진행된 한국의집 전통혼례는 유관기관 및 국내외 관광객들의 큰 관심 속에 호응을 얻었으며, 첫해 전통혼례를 통해 373쌍의 부부가 화촉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전통혼례는 한국의집 전통혼례를 계기로 분기점을 마련하며 대중화되고 재단 수익에도 도움이 됐다. 1982년 4월 15일 재단은 서울전수회관을 무형문화재전수회관으로 개관해 수탁 관리에 들어갔다. 무형문화재전수회관은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의 전신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벽돌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무형문화재 기·예능 연마와 발표 및 전수를 위해 설립된 무형 문화재전수회관에서는 보유자 개인 및 단체의 발표 공연, 기획 행사 등 전승보존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로써 이미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부산, 통영, 고성, 양주 등 지방의 전수활동처럼 서울에서도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1984년 8월 재단은 『월간 문화재』를 창간했다. 이 잡지는 문화재 전반의 소식을 다루기 위해 창간됐으며, ‘문화재는 우리의 자랑’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사업 영역 확장, 한 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1985년 사업기반을 다진 재단은 무형문화재 공개·전수·전승을 목적으로 건립된 ‘서울놀이마당’을 서울시로부터 관리 수탁 받아 시민들에게 전통예술공연의 진수를 제공했다. 특히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대형 국가 행사인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들이 보다 많이 한국의집을 이용할 수 있도록 1986년 100석 규모의 민속극장을 189석으로 확장했다. 이어 1988년에는 ‘청우정’과 ‘녹음정’을 건립하여 전통생활문화교육관으로 운영했는데, 이로써 한국의집은 명실상부한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재단 자립 기반의 초석이 됐다. 같은 해 1988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전통공예관을 이관 받아 제13회 전승공예대전 개막과 함께 개관했다. 전통공예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전통공예관 마련과 전승공예대전을 개최한 것은 재단이 그 첫 사업으로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재단의 설립 취지는 민간 차원의 문화재 보호운동을 확산하는 데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집과 무형문화재공연, 전시 등 수탁 사업 외 중요한 사업이 문화재애호 캠페인, 문화재백일장 및 사생대회, 전통문화강좌, 문화재답사, 문화재사진공모전이라 할 수 있다. 86년부터 임직원들이 직접 경복궁 등 고궁과 왕릉, 사찰 및 성곽 등 주요 문화재지역을 방문하여 관람객 대상으로 문화재보호 캠페인을 개최했고, 어린이 청소년 문화재 애호 백일장 및 글짓기 대회를 개최해 국민들로 하여금 문화재 보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외에도 같은 해 문화재 사진공모전과 전통문화강좌를 개최했고, 87년에는 문화유적지답사를 개최하여 이후 전국적으로 문화유산답사 붐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1987년은 재단이 장학사업을 시작한 의미 있는 해다. 1987년 2월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김정연 씨가 ‘후배 양성을 위해 써달라’며 국가에서 준 전승지원금을 평생 모아 마련한 1천만 원의 출연금으로 시작된 장학사업은 현재까지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학사업의 모태가 됐다.
창립 10주년이 된 1990년 재단은 전통문화 교육, 문화재 애호 사업, 전통 예술공연, 전통공예전시 등 사업 범위와 질을 높여 재단 가치를 알리고 드높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01_ 1957년부터 1997년까지 손님을 맞이한 한국의집 솟을대문
02_초창기 한국의집 전통혼례(1982.2)
03_’97문화유산의 해 선포식 기념 공연(세종문화회관, 1997.1.21)
●성장발전기(1990년대) 한마음 한뜻으로 새롭게
1992년 9월 1일 ‘한국문화재보호협회’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재단 심벌과 상징색, 로고도 새로 만들고 본부 사무실도 한국의집 앞에 있는 대림자동차빌딩 10층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출발했다.
1993년 재단은 축적된 전문성과 역량을 모아 93일간 대전 엑스포 놀이마당을 운영했다. 연일 초만원을 이루며 흥과 신명의 한마당으로 펼쳐진 이 행사에서 전통공예관은 시연이 곁들여진 전시로 185만여 명이 관람하는 큰 성과를 얻어 재단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엔 한국의집을 찾아준 이용객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한국의집 음식 큰잔치’를 개최했고, 전통음식강좌를 개설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94년 말 개관 10주년을 맞은 서울놀이마당은 총 712회 공연에 240만 명이 관람하는 성과를 거두는 등 서울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제2 창업과 성장동력 확보
재단 창립 15주년을 맞는 1995년에는 ‘제2 창업’의 사명의식을 갖고 재단의 새로운 도약을 선포했다.
먼저 ‘매장문화재발굴조사실’을 신설하여 그동안 무형문화재 중심 사업영역에서 유형문화재 영역으로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1995년 8월엔 ‘전통공예관’을 ‘한국전통공예미술관’으로 개칭하고 경복궁 내 옛 민속박물관 자리로 시설을 확대 이전했다. 이곳에서 6개 전시실과 12개 공방을 운영했는데, 디자인실 신설과 전통문화상품 판매장도 마련했다. 또한, 한국의집을 운영하면서 얻은 경험과 한국 음식에 대한 학문적 자료를 널리 알리고자 『한국음식대관』 발간을 결정하고 이 사업을 6년에 걸쳐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아울러 서울놀이마당에서는 이 시대 농악·무속 명인들을 발굴하여 발표하는 명인전 시리즈를 기획하여 무형문화재 발굴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민속주 ‘ 주’로 전통 주류 품평회를 개최해 민속주 보급과 상품 개발에 활용했다.
1996년엔 발굴조사실을 발굴조사사업단으로 확대 개편해 임당, 상주, 서해안 등 전국에 걸쳐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정부가 1997년을 ‘문화유산의 해’로 정하자 재단은 북한무형문화재전, 문화재 알기사업, 문화유산 찾기사업, 문화유산 가꾸기사업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을 추진해 일반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여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04_발굴조사단 중부사무소 개소 기념 발굴 유물 전시회(2000.6.8)
05_처음 실시한 궁중의례 재현 행사 세종대왕 즉위식(1999)
06_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개막식(1998)
07_제1회 한국전통음식문화관광축제 개관(한국의집, 2005.12.6)
1997년 11월 27일 재단은 본부를 중구 필동에서 강남구 삼성동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으로 이전했다. 경복궁 내 전통공예미술관 건물이 철거됨에 따라 본래 수행했던 공예분야 기능을 축소하고 예능분야를 흡수해 그 기능을 이전했으며, 전통공예건축학교는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가건물로 1998년 3월 이전했다.
재단은 한정된 공간과 예산 부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통 생활문화 체험과 교육에 대한 대안을 꾸준히 마련했다. 이 시기 서울시가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고 위탁운영자를 공모했는데, 재단이 참여해 위탁사업자로 선정됐다.
1998년부터 재단은 특수학교, 소외 지역, 소외 계층을 위한 꿈과 희망의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에는 처음 구성된 풍류단과 한국의집 전속공연단이 연계 활동을 함으로써 재단 내에 두 개의 공연팀을 운영하게 됐다. 한편 이 시기 재단은 문화관광부에 문화상품관 건립 계획을 제출해 상품 개발과 보급의 기초 역량을 축적했다. 이어 2억 5천만 원의 관광진흥개발기금 지원과 재단 자금을 더해 한국의집 문화상품관 개관 공사에 들어갔다. 특히 1999년은 ‘세종대왕 즉위식’과 ‘종묘제례악연주’ 등 국제행사를 진행하면서 재단 역량을 전 세계 문화관계자들에게 널리 알린 해였다. 또한 발굴사업 부문에서도 큰 발전의 획을 그었다. 충북 청원 폐교 부지를 구입해 문화재조사연구단 현도사무소를 운영하고, 전통문화교육홍보관(현재의 KOUS) 건립을 위한 설계비를 국고로 확보하고 2000년에는 건축비를 확보함으로써 재단의 자립기반과 목적 사업 확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도약기(2000년대) 새로운 비전으로 더 큰 뜻을 품다
새 천년인 2000년, 재단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21세기 도약의 시대, 비전 2010’을 선포하며 전통생활문화의 보급과 청소년을 위한 전통문화 체험교육에 사업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의집을 새롭게 단장했으며, 한국의집 별관 ‘취선루’를 보수하여 문화상품관으로 활용했다. 전통문화홍보교육관 건립에도 박차를 가했다. 문화재조사연구단은 충북 청원군에 중부사무소를 개소한 데 이어 경주에 남부사무소 건립을 위한 부지를 매입해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으며,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새롭게 의지를 다진 재단은 다양한 사업들도 함께 전개했다. 2000년 4월 전통혼례 사업을 재개했으며, 한국의집 민속극장 관람객이 100만 명을 넘어 전통예술공연장으로서 위상을 높였다. 한국관광공사와 함께 해외 홍보와 마케팅의 전략적 접근을 시도했으며,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앞두고 중국과 일본에서 여행객 유치 행사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2000년 말 재단은 근무 인원 190명, 예산 124억 원 규모로 성장해 설립 당시에 비해 인력 10배, 예산 50배가 증가했으며, 적립금과 부동산 등 순자산은 20여억 원에 이르렀다.
장기사업계획을 추진한 첫해인 2001년 재단은 ‘문화재 보호·보존단체의 선도적인 리더로 21세기 전통생활문화의 창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업 내실화와 21세기 환경에 맞는 사업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임직원이 뜻을 한데 모았다.
우선 ‘2001년 한국방문의 해’와 ‘2002 한·일 월드컵’ 개최에 맞춰 한국의집이 연중무휴 영업을 선언하며 남산골한옥마을과 연계해 국내외 관광객을 맞았다. 특히 궁중문화 재현행사인 ‘조참의’와 ‘세시절’ 행사는 국내외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2001년 7월 숙원사업이었던 서울시 강남권의 ‘한국의집’격인 전통문화홍보교육관 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문화관광부가 추진한 중국 현지의 ‘한국의 달’ 행사에서 ‘한국전통공예특별전’을 개최했으며,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통해 전통공예의 세계화를 추진했다. 특히 한국의집 조리팀이 국제요리축제에서 상을 받은 것도 기념할 만한 일이다.
‘문화재 사랑 홈페이지 공모전’도 이 시기 처음 시행했다. ‘제1회 어린이 민요부르기 대회’, ‘전통문화 학술세미나’ 등을 같은 시기에 개최하고 특히 1995년 발간 계획을 수립해 연차 사업으로 추진하던 『한국음식대관』 전 6권을 완간해 한국 전통음식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물로 남겼다.
조직 역량 강화로 더 크고 높게 비상하는 재단
2002년 재단은 전통문화와 정보기술의 접목을 통한 전통문화 대중화와 재단 이미지 브랜드화에 주력했으며, 특히 특수법인화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재단 위상을 높이기 위해 수년간 추진해왔던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심의·의결되면서 특수법인화가 확정된 것이다.
2002년 주요 사업성과는 세종대왕 즉위식 등 궁중문화를 엿볼 수 있는 행사와 경복궁을 무대로 조선시대 궁성문 개폐 및 수문장 교대의식 등 재현행사를 펼친 것이다. 특히 2002년 첫선을 보인 수문장 교대의식 행사는 약 6개월간 180여만 명이 관람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3년 7월 1일 재단은 특수법인으로 재탄생하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고를 지원받을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이전까지 사용료를 지불하던 한국의집을 비롯한 국·공유지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재정적으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재단을 책임지고 운영할 수장인 이사장도 정부 방침과 사회적인 요구를 적극 수용해 공모를 통한 이사장 추천제를 도입해 투명한 절차로 선임했다.
2004년은 재단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한 해였다. 먼저 지방자치단체로의 진출을 꼽을 수 있는데, 2004년 1월 1일 자로 ‘전주전통문화센터’의 새로운 수탁자로 관리운영을 맡으면서 전통문화특구인 전주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2004년 10월엔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에 한국을 방문하거나 경유하는 외국인들이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상설체험관을 만들어 운영했다.
2005년 재단은 기존의 3단장, 5개 실, 3관, 1과 1실 1단 30개 팀으로 구성된 조직을 1단장, 4개실, 2관, 1부, 20팀으로 개편했다. 우리의 전통문화가 미래의 대표적인 트렌드로 부상할 수 있도록 내부 역량을 강화해 기존 사업의 질적인 향상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일류 문화유산기관으로 가는 마중물, 혁신
2006년은 재단이 업무혁신을 통해 조직 역량 강화에 힘쓴 해였다. ‘혁신을 통한 전통문화의 보존, 전승 및 보급 확산’이라는 비전을 선포하고 문화재청과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한다는 공동 미션의 효율적인 달성을 다짐했다. 주요 사업으로는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종묘제례에 국내외 귀빈들을 초청, 이를 국제적인 문화행사로 승격시켰다. 특히 전통문화 희귀도서로 구성된 한국문화유산 정보자료실을 구축해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2007년 재단은 새로운 비전으로 ‘일류 문화유산기관’을 세우고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케팅부를 신설해 다양한 전시관과 새로운 문화행사를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아울러 창덕궁 ‘동궐마루’, 덕수궁 ‘돌담길’, 국립고궁박물관 ‘고궁뜨락’ 등 편의시설을 각각 개관했다. 기존 전통문화사업의 내실화를 추구하여 상설공연을 테마별로 기획해 진행했다.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을 알리기 위한 홍보작업과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 개발에도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9월 13일에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저작권 위탁관리 사업을 시작했다. 이외에도 베트남, 몽골 등 국외사업에도 주력했으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문화 프로그램도 개설 운영했다.
창립 30주년을 앞둔 2009년은 부문별 혁신 변화를 꾀한 해였다. 한국의집은 혁신의 일환으로 ‘고품격화’를 선언하고 취선루를 ‘취선관’으로 새롭게 명명했다. 인천국제공항 한국전통문화센터를 새롭게 개관했고, 12월엔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내 편의시설을 개관했다.
2008년 말,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한 아태무형유산센터는 2009년 1월 15일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설립 추진 업무에 들어갔다. 2009년 9월 문화재청으로부터 업무를 일부 이관 받아 실시한 ‘한 문화재 한 지킴이’ 사업 참여도 눈에 띈다.
2009년은 한국의집 마케팅 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는데, 한국의집 문화상품권 발행과 우수고객 및 VIP 우대제도를 시행하고, 고객지원센터를 운영하여 서비스 및 예절 교육을 정례화했다. 특히 국내외 온라인 키워드 마케팅, 바이럴 마케팅을 활성화하고, 블로그 신설과 온라인 뉴스레터를 4,500여 명의 고객에게 발송하는 등 재단 홍보도 꾸준히 했다. 한편 재단은 2009년 7월 20일 조직을 개편해 13부서 36팀을 10부서 28팀으로, 인력은 285명에서 250명으로 축소했다. 예산은 531억 원으로 전년 대비 26% 증가됐다.
08_ 남북문화재도서전 개막 및 전시 관람(2006.8.18~9.12)
09_ 라오스 홍낭시다 사원_해체조사
10_캄보디아 프레아피투 따 투옷 사원
미래를 향해(2010년대) 미래를 향해 새로운 도약을 다짐
2010년 재단 창립 30주년을 맞아 미래를 향해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한국의집 등을 통한 안정적 재원 확보로 경영 활성화를 추진하고, 재단 대외 이미지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매년 발간되는 『재단 연보』는 30년 성년의 한 획을 긋는 해의 일상을 기록한다는 의미를 더했고, 『재단 30년사』 발간도 함께 추진됐다.
전시와 공연사업은 현대적인 재해석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관심과 참여의 폭을 넓혀 문화유산의 전승과 보급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아울러 전통공예학교는 교육시설 확충이 필요할 만큼 큰 반응을 보였고, 문화재 발굴사업은 소규모 발굴에 대한 전액 국비사업으로 새롭게 시작됐다. 궁궐 재현행사는 훨씬 다채롭게 진행해 국내외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한국의집에서는 취선관을 신축해 전통문화 체험을 한층 더 활성화했다. 특히 인천국제공항의 한국전통문화체험센터도 인천공항이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평가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10년에 주목할 만한 성과로는 지난 30년간 재단이 무형유산의 보호, 보존 및 전승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경험과 지식을 인정받아 유네스코에서 동 자문기구로서 자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로써 재단은 향후 유네스코 무형유산 긴급보호목록 등재를 비롯하여, 협약 관련 프로그램 및 국제원고신청 심사 등에서 정부 간 위원회에 자문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국제 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2010년에 재단은 궁궐엽서, 마우스패드, 수첩, 책갈피 등 총 34품목 224종의 문화상품을 개발해 국립고궁박물관 뮤지엄 숍 & 카페 ‘고궁뜨락’에서 판매해 큰 인기를 끌었다.
2012년은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서 위상을 세계에 널리 알린 해였다. 유튜브 조회 수 1위를 기록하며 지구촌을 열광시킨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은 전 세계 이목을 한국에 집중시켰고,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아리랑’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는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드라마 한류, K팝 한류를 넘어서 ‘K-컬처’가 주목받는 한류 3.0 시대가 도래하여,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도 높아졌다. 특히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이10주년 되는 해이자,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의미 있는 해이기도 했다. 또한 국제행사 참가를 목표로 한 ‘연희단 팔산대’ 예술단을 특별히 기획해 ‘2012 여수엑스포’와 ‘2012 런던올림픽’ 무대에서 기량을 펼쳤다. 한편 재단 내부적으로는 ‘국제교류팀’을 출범해 해외문화교류사업을 강화하고, 정부 최초로 시행되는 라오스, 캄보디아 문화유산 복원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2013년 재단은 ‘문화융성’이라는 프레임 아래 공연, 전시, 체험,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문화유산의 가치 확산을 도모하고, 종묘대제와 숭례문 준공기념행사를 비롯한 경복궁 교대의식, 창덕궁 달빛기행, 덕수궁 풍류 행사 등으로 한국 문화융성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1_ 창덕궁 달빛 기행(2018)
명실상부한 공익기관으로 거듭나
2014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한국문화재재단’으로 기관 명칭을 바꾸었다. 그동안 재단은 다양한 문화유산 활용 사업을 수행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라는 명칭으로 인해 그 역할과 위상이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앞서 5월 28일 개정된 문화재보호법을 통해 재단에서 해야 할 사업이 구체적으로 명시됨으로써 문화유산 활용에 대한 재단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한국문화재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더불어 <한국 문화유산과의 친근한 만남>을 목표로 문화유산 영상콘텐츠 사업을 시작했다. 7월 11일에는 GKL 사회공헌재단과의 MOU, 12월에는 sky TV와 MOU를 체결해 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했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경회루 성하에 물들어’ 야간 공연과 ‘덕수궁 석조전 미디어 파사드’, ‘굿보러가자’ 연해주 공연 등의 사업에 광복의 의미를 담아 국내외에서 진행했다. 가을에는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문화유산 장인 박람회’에 주빈국으로 참여했고, 나미비아 빈트후크에서 개최된 ‘제10차 무형유산보호정부간위원회’에서는 ‘줄다리기’가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어 재단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국제자문 NGO로서 재인가를 받는 쾌거를 이뤘다.
2016년 재단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대하는 성과를 내고자 노력했다. 한국 전통공예계의 가장 큰 행사인 ‘대한민국무형문화재대전’을 개최해 대한민국공예박람회로서 전시와 홍보, 판매까지 외연을 확대했고, 보유자, 기능보유자, 이수자 등에 대해 보존과 전승을 위한 지원을 강화했다. 2017년 재단은 전수교육관과 한국문화의집 상설공연, 경복궁 수문장교대의식 등 행사를 상설 운영해 고궁별 공연과 체험을 브랜드화하는 데 주력했다. 왕실문화 콘텐츠의 종합축제인 ‘궁중문화축전’은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주제로 이를 기념하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했다. 아울러 개관 60주년을 맞은 한국의집은 ‘1957 한국의집’ 브랜딩 강화의 일환으로 한국의집 60주년 전시, 취선관 재개관 행사 등을 시행했다. 한편 재단은 12월 9일 아시아태평양 지역 유네스코 무형유산 심사기구로 선정됐다. 2018년 재단은 2월 7일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대회와 문화올림픽 홍보 행사를 효율적으로 실시하고자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한국전통문화센터’를 신규로 개관했다. 평창동계올림픽과 동계패럴림픽대회 기간 중 선보인 ‘심청’과 ‘명인전’ 공연은 선수들과 응원단에게 깊은 문화적 감동을 주었다.
2019년 4월 개최된 ‘제5회 궁중문화축전’은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의 4대 궁에서 경희궁까지 포함되어 서울의 5대 궁과 종묘에서 열렸다. 5대궁 완전체로 시행된 궁중문화축전은 광화문까지 연결되어 역대 최대 규모의 전통과 오늘, 예술과 기술, 공연과 체험이 한바탕 어우러지는 만남의 장으로 열렸다. 8월에 진행된 ‘경복궁 별빛야행’은 궁궐 문화콘텐츠 다양화를 목적으로 궁중음식 체험과 전통공연, 경복궁 야간해설 탐방이 결합된 특색 있는 행사였다.
한편 재단은 12월 14일 세계탈문화예술연맹 및 세계무술연연맹 등과 함께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된 ‘제14차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NGO로 재승인됐다. 2020년은 재단이 창립 40주년을 맞는 해로 온전한 성년에 접어드는 역사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신념을 갖고 창의적인 행보를 뚜벅뚜벅 이어가는 한국문화재재단의 열정을 기대한다.
세계 일류 문화유산기관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올해로 창립 40주년을 맞이한 한국문화재재단의 문화적 의미는 매우 크다. 1980년대 초, 전통문화 전승기반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인식 자체가 매우 낮았던 시기에 문화재 보호운동으로 전통문화 보호, 복원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의 제정으로 보유자와 조교, 이수자 등 전승자가 지정되었지만 공연, 전시, 교육 등 활동을 위한 무대는 크게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재단이 발족하면서 한국의집, 전수교육관, 한국문화의집, 인천국제공항 전통문화센터를 비롯하여 경복궁 등의 행사와 공예작품 출품으로 전승자들의 활동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고 더불어 국민들도 문화유산을 접할 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특히 재단은 각종 기획공연 및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기념 공연, 97문화유산의해 기념공연, 2012년 여수엑스포 등 국가급 문화행사를 개최하면서 무형문화재보유자 등의 참여를 확대한 것은 큰 성과다.
80년대 중반부터 문화재청 주관으로 시작된 창경궁, 경복궁 궁궐 원형복원 사업과 연계하여 조선시대 즉위의식, 국가혼례, 조회, 궁중연향 등 궁중생활상을 재현하여 전통문화 다양성을 증진하고 관광자원화 한 역할을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집을 중심으로 궁중음식 기반의 전통음식 개발 보급과 전통혼례를 상설 운영하여 도시화, 산업화 속에서 국민들이 고유의 본 모습을 함께 누리고 활용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것이다.
1995년 발족한 문화재조사단을 통해 당시 발굴조사 업무의 조사기준은 물론 대가기준, 보고서 작성 등 업무 전반에 걸쳐 객관성과 공공성을 강화했으며, 특히 소규모발굴조사업의 전담으로 인해 과거 일반 법인에 비해 예산 절감과 대기 기간의 단축 등 획기적 업무 개선으로 수혜 대상을 확대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국내 문화재 조사 복원 경험을 바탕으로 라오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등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 ODA(공적개발원조) 사업을 개척하여 대한민국의 문화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문화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12_ 인간문화재 공예전(국립무형유산원, 2014) 13_궁중문화축전 전야제(경복궁, 2018)
- 글. 박영우[사사(社史)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