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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정담

한미한 집안 출신인 장옥정은 숙종의 후궁으로 왕비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드라마틱하게 신분 상승한 궁중 나인부터 명문가 출신까지 다양한 계층의 여인들이 후궁 첩지를 받들었다.

후궁은 누구인가?
후궁은 중국 천자가 거처하는 궁중의 전전前殿 뒤에 있는 깊숙한 부분이라는 뜻으로 내궁內宮, 내정內庭, 후정後庭이라
고도 하였다. 후궁은 명목상 황제의 적처인 황후 외의 여러 부인들을 지칭하였고, 황제의 잠자리를 시중들기 위해 존재했다.
고려시대에는 왕의 정처는 왕후, 첩들은 부인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품계상 정1품이며, 원주, 궁주, 옹주 등의 칭호
를 받았고, 귀비, 숙비, 덕비, 현비 등의 칭호로 구분되었다. 특히 옹주는 후궁뿐 아니라 왕의 딸이나 며느리를 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의 첩을 모두 후궁이라 하였다.
후궁이 되는 법
조선시대의 후궁은 대체로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책봉되었다. 하나는 처음부터 왕비나 세자빈처럼 전국에 금혼령을 내
리고 처녀들을 간택하여 빙례를 갖추어 후궁으로 들이는 경우(간택후궁)이다. 또 다른 하나는 궁녀로 입궁했다가 왕의 승은을
입어 봉작을 받아 후궁이 된 경우(승은후궁)이다. 전자는 양반명문가 출신이고, 후자는 한미한 집안의 궁녀 출신이었다. 간택
후궁은 입궁 때부터 종2품 숙의 이상의 품계에 봉작되어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간택과 승은 외에도 권력자들의 진헌, 왕실 여성들
의 추천 등 특별전형을 통해서 후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왕비는 양반 출신이었지만 후궁은 양반은 물론 중인, 노비, 과부까지 신분이 다양했다. 태종은 과부 2명을 후궁으로 삼았고(아직 고려의 요소가 남아 있었다), 철종의 후궁 12명은 모두 궁녀 출신이었다.
그러나 한두 번 왕의 승은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승은을 입고도 후궁 책봉을 받지 못하고 상궁에 머물거나 더 낮은 품계에 머문 궁녀들도 있었다.
후궁은 왕이 직접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세자나 왕자의 첩으로 있다가 남편이 왕이 되면서 후궁으로 책봉된 경우도 있었다.

후궁의 품계
조선시대 후궁은 일종의 관직 체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내직’ 혹은 ‘내관’ ‘여관女官’이라 부르다가 <경국대전> 편찬 이후에는 ‘내명부’라고 하였다. 따라서 후궁은 정1품~종4품
의 품계가 부여되는 공인이었다. 그들에게는 품계에 따른 지위와 명예, 재산이 주어졌다.
이들의 지위는 왕비에 비해 훨씬 낮았지만 왕의 총애를독차지하는 경우에는 왕비 부럽지 않았다. 후궁의 지위는 왕의 총애와 왕실에 대한 공헌, 즉 자식을 많이 낳는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후궁 중에는 선조 대의 인빈 김씨, 광해군 대의 상궁 김개시, 숙종 대의 희빈 장씨, 숙빈 최씨같이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도 있었다.
왕세자의 첩은 종2품 양제부터 종3품 양원, 종4품 승휘, 종5품 소훈 등 4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후궁의 임무
후궁에게도 저마다 일정한 직무가 있었다. 그런데 <경국대전>에는 후궁들의 입궁, 승진, 업무 등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정원이 몇 명인지, 어떻게 선발한다는 원칙도 없고, 품계만 나뉘어 있을 뿐이다. 왕의 마음이 많이 작용한다는 의미
일 것이다.
그러나 후궁들도 왕과 개인적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왕비를 보좌하는 직무를 맡았다. 1품의 빈과 귀인은 왕비를 보좌하며 부례婦禮를 논하는 일을 맡았고, 2품의 소의와 숙의는 비례備禮를 찬도하였으며, 3품의 소용과 숙용은 제사와 빈객에 관한 일을 맡았고, 4품의 소원과 숙원은 잠자리를 베풀고 사시絲枲 - 모시를 다스려 해마다 공을 바쳤다. 왕의 잠자리를 위해서뿐만 아
니라 궁중의 제반 사무를 분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고 볼 수있다. 따라서 이것은 매우 현실적이고 제도적인 임무 부과였던
것 같다.

후궁의 수
그럼 조선시대에는 후궁들이 얼마나 존재하였을까? 조선왕조 500년 동안 후궁의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
다. 무엇보다 그럴 만한 자료가 없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나<조선왕조실록> 등에 보이는 후궁들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태종은 후궁제의 기초를 닦으면서 왕이 3명의 아내를 둘 수 있는 ‘1빈 2잉’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후궁을 여럿 두어도 무방했다. 세종은 아들 문종을 위해 권씨·정씨·홍씨 등 3명의 후궁을 동시에 뽑았다. 후궁 수는 왕
마다 다르지만 조선 초기에는 대략 7~8명을, 후기에는 평균 3명을 두었다.
조선시대 즉위한 왕은 27명이지만 추존된 덕종, 원종,진종, 장조, 익종까지 합치면 모두 32명이다. 32명의 왕이 둔 왕비 수는 47명이고, 후궁 수는 166명 정도 된다. 왕비의 3배가 넘었다. 이 가운데 5명은 나중에 왕비가 되었다. 후궁의 수는 조선초기에 많았고, 성리학이 심화되면서 후기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또한 전기에는 간택후궁의 수가 승은후궁과 비슷했지만 점차 간택후궁 수는 줄고 승은후궁이 늘었다. 실제로 대략 166명 중에 9명이 간택후궁이며, 광해군 이후에는 현격하게 줄었다. 전체적으로 승은후궁이 간택후궁보다 훨씬 많았다. 또한 승은후궁이 낳은 왕의 자녀가 왕비나 간택후궁이 낳은 수보다 훨씬 많았다. 왕은 승은후궁을 훨씬 더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왕을 낳은 후궁들, 칠궁
후궁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 세자가 되면 특별대우를 받아 정1품 빈에 책봉되고, 궁호를 하사받았다. 빈으로 책봉된 후궁 가운데 칠궁은 왕의 어머니가 된 후궁이다. 즉 원종(인조 아버지), 경종, 진종(효장세자), 장조(사도세자), 영조, 순조, 영친왕의 어머니를 말한다. 왕비는 죽으면 왕과 함께 신위를 종묘에 모셨지만 후궁은 종묘에 모실 수 없어 따로 사당을 설치해 모셨다. 또한 왕비는 죽어서 왕의 곁에 묻힐 수 있었지만 후궁은 같이 묻힐 수 없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이라 한 데 비해 후궁의 무덤은 원이라 하였다.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
조선의 왕 가운데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은 태종으로 19명을 두었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14명, 성종이 13명, 고종이 12명, 연산군과 중종은 11명, 정종은 8명의 후궁을 두었다. 성종의 후궁 2명은 후에 왕비가 되었고, 중종과 숙종의 후궁 중 한 명도 나중에 왕비가 되었다. 후궁을 두지 않은 왕도 있었으니 현종, 경종, 순종이며, 순조는 한 명을 두었다. 단종과 헌종은 2명, 인종과 효종은 3명, 인조, 영조, 정조는 4명의 후궁을 두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왕은 한 명에서 많게는 19명의 후궁을 두었다

왕후로 승격된 후궁
조선시대 즉위한 27명의 임금이 맞이한 왕비는 모두 37명이다. 성종, 중종, 숙종은 3명씩이고, 태조, 예종, 선조, 인조, 경종, 영조, 헌종은 2명씩이며, 나머지 17명의 왕은 한 명씩을 두었다. 후궁 중에서 왕비의 지위를 얻은 여성은 6명이다. 왕비의 신분을 최초로 획득한 후궁은 문종의 세자 시절 첩이었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이다. 이후 두 번째 후궁은 예종의 둘째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다. 연산군의 어머니의 폐비 윤씨도 후궁 출신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두 번째 왕후인 장경왕후 윤씨도 후궁 출신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양반 출신의 간택후궁이었다. 승은후궁으로 왕비에 오른 경우는 희빈 장씨밖에 없다. 장희빈이 죽임을 당한 이후에는 숙종이 ‘후궁으로는 왕비를 삼지 말라’고 명함에 따라 후궁으로 왕비가 된 여성은 없다.
후궁이 되었다가 지위를 박탈당한 후궁
세조의 후궁 소용 박씨 덕중은 수양대군 시절 애첩이었다가 세조 즉위 이후 소용의 작첩을 받았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후 환관 송중을 사랑하여 처벌을 받았고, 또 종친인 구성군 준을 연모하여 편지를 보낸 일이 문제가 되어 교형까지 당하였다. 정종의 시비 기매도 영안대군 시절에 아들을 낳았으나 환관 정사징과 간통하여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궐 밖으로 쫓겨났다.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참소하여 죽게 했다 하여 연산군이 정씨의 아들 안양군 이항과 봉
안군 이봉으로 하여금 때려죽이게 하였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연산군은 내수사를 시켜 그들의 시신을 찢어 젓을 담가 산과
들에 흩어버리게 하였다.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를 모략하여 죽게 하는 데 일조했다 하여 정조에 의해 작위를 박탈
당하고 궁에서 폐출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선왕의 후궁들이 모여 살던 별궁
후궁들은 자신이 모시던 왕이 죽으면 궁궐을 나와 별궁에 모여 살았다. 세종은 부왕인 태종이 죽은 뒤 그의 후궁들을 의빈궁에 모여 살게 했다. 세조는 의빈궁을 영수궁이라 개명하였다. 세종이 죽자 그의 후궁들을 자수궁에 거처하게 하였고, 문종이 죽자 그의 후궁들은 수성궁에 모여 살게 하였다. 이후 후궁들은 자수궁에 거처하였으나, 성종은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거처하는 곳을 창수궁이라 하여 특별히 구분하였다. 성종대 연산군의 생모 윤씨는 폐비되어 일시적으로 자수궁에 거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