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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만져보고 싶은 칼
만약 한국인들에게 가장 갖고 싶은 또는 가장 만져보고 싶은 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어떨까? 단연코 이순신 장군의 칼, 충무공 장검일 것이다. 겨레를 살린 칼, 충무공 장검. 그 두 자루 장검이 만들어진 지 올해로 7주갑(420년)이 되었다.
충무공 장검(보물 제326호)은 400년 넘게 충남 아산의 이충무공 종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두 자루 칼로, 난중일기와 함께 이순신장군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난중일기가 이순신의 문(文)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칼은 그의 무(武)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칼은 어른 키보다 훨씬 긴 길이(두 자루 모두 무려 197cm이다)와 5kg에 달하는 무게, 그리고 칼날을 직접 사용하여 충격을 받은 흔적(격검흔, 擊劍痕)이 없는 점들을 보아 실제 사용한 칼은 아니라고 본다. 더욱이 두 자루를 만들어 대구(對句)를 이루는 검명(劍銘)을 새긴 것으로 미루어 통제사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의장용이거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걸어두고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무과시험과목에도 활쏘기가 주를이루고, 검술이 없을 만큼 전통적으로 활을 중시한 반면, 칼에 대해서는 그 비중이 높지 않아 지금까지 전해오는 도검류 유물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칼은 충무공의 유물이라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금속가공기술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함께 보여주는 귀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하겠다.
조선의 장인(匠人)이 만든 조선 칼
이 칼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일본도를 닮았다는 둥 칼의 명칭이 잘못되었다는 둥 말이 많다. 하지만 전통 도검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칼날의 규격과 혈조의 형식, 코등이 장식에서 일본도의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조선 칼의 전형”(이석재, 경인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장인(匠人)이 만든 엄연한 조선 칼인 것이다.
칼을 들여다보면, 칼날의 길이는 137.5cm 안팎으로 대단히 긴데, 전체적으로 휘임각이 큰 편이며 단면은 오각형이다. 칼등 쪽에 칼날 중간까지 폭이 넓고 좁은 두 줄기 골(혈조, 血槽)이 위아래로 나란히 파여 있고, 그 아래쪽으로 구름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이 혈조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이 붉은 칠은 근래에 칠해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원래는 붉은 옻칠(주칠, 朱漆)이 되어 있는 것이 색이 바래 다시 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 정확한 분석을 통해 칼에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에서 원래 모습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혈조 아래에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검명(劍銘)이 음각되고 황동(黃銅)으로 입사되어 있다. 『이충무공전
서』 1권 「잡저(雜著)」에 “검명을 장검 1쌍에 갈라 새겼는데 공의 글씨다.(劍銘 長劍一雙分鐫卽公筆也)”라고 되어 있어 장군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 계사년(1593) 9월 15일 일기 뒷부분에 “尺劍誓天 山河動色(척검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떤다)”라는 비슷한 구절이 보여 오랫동안 이 문장을 생각하고 다듬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칼자루는 길이가 60cm에 달하며 두께도 직경이 5cm에 이를 만큼길고 크다. 나무에 일부 황동판을 대고 주칠을 한 어피(魚皮)로 감싼 후 그 위에 다시 옻칠한 가죽끈을 X자 모양으로 교차하여 묶었다. 칼자루 끝 부분, 즉 칼머리에 덧댄 원뿔 모양의 뒷매기는 위쪽에는 빗금무늬를, 옆면에는 모란을 은입사 하였다. 칼날의 뿌리 부분을 감싼 환도막이(호인, 護刃)는 청동이고, 칼자루와 칼날 사이에 끼워서 손을 보호하도록 만든 코등이는 순동으로 국화 문양이 투각되어 있다. 칼날 부분과 칼자루의 비례가 2.3:1에 불과해 한눈에 보아도 칼자루가 아주 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어피를 씌운 다음 다시 검은 옻칠을 하였다. 칼집 끝은 모란을 은상감한 무쇠
로 감쌌으며 칼집 입구에도 포목상감(쪼음입사)으로 기하학 무늬를 은입사였는데, 이런 기법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이 칼에는 특이하게 칼자루 속 슴베에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戊生)”는 글이 새겨져 있
어 만든 이와 시기(1594년, 선조 27)를 알 수 있다. 난중일기 1595년(을미) 7월 21일 자에 “태구련(太九連)과 언복이 만든 환도”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슴베 속 태귀련과 일기 속 태구련을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이 슴베의 기록에 관련하여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기네 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슴베의 글귀를 보여주자 무안하여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장검인가 환도인가
요즘 우리는 보통 칼날이 하나이면 도(刀), 양날이면 검(劍)이라 분류한다. 그래서 칼날이 하나인 이 칼은 환도(還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환도는 어떤 특정한 양식의 칼이라기보다는 조선시대에 무기용 외날 칼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32년 현충사 중건 당시 이충무공 유적보존회에서 세운 「현충사사적비」에는 “친히 쓴 일긔와 환도 금대 옥로 다 조선의 받들고 지킬 바이라”라고 하여 ‘환도’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도 환도란 단지 (조선)칼이라는 의미로 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도와 검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구분 방식도 지금과 같지도 않았다. 1790년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는 “칼의 양편에 날이 있는 것을 검이라 하고, 한쪽만 날이 있는 것을 도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1813년 편찬된 조선후기 무기종합백과사전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는 “도는 자루가 길고 칼날이 휘어져 있으며 손잡이 머리가 있었다. 검은 자루가 짧고 칼날이 길며 칼집이 있었다”고 하여 오늘날과 구분방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책 모두 “후세에 와서 도와 검이 서로 혼용되었다”거나 “오늘의 사람들은…분별하지 않고 모두 도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어 도와 검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칼은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서 장검(長劍)이라 적고 있는데, 당시에 일반적인 조선 칼, 즉 환도 중에서도 유달리 길고 커서 특별히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 충무공 “장검”은 이순신 장군이 지녔던 조선 환도를 따로 부르는 고유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난중일기』라는 이름도 원래 이순신 장군이 남긴 초고본에는 각 표지에 임진, 계사와 같은 간지만 있던 것을 『전서』를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인 것과 맥을 같이 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1963년 보물 지정 때 ‘장검’으로 이름 붙여져 지금까지 가장 널리 불리고 있다.

이 칼이 만들어진 갑오년 4월은 전란이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때였다. 이때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지만, 전염병과 기근으로 진중에서는 죽어 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일본군과 큰 전투 없이 지루한 대치 상태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다시 각성하고자 이 두 자루 칼에 그 뜻을 새긴 것이리라. 날카로운 칼에서 나오는 본래의 엄정함에 더해 이순신의 각오가 아로새겨진 글귀가 겹쳐 이 두 자루 장검은 묘한 울림으로 오늘도 그 앞에 많은 사람의 발길을 붙들어 두고 있다. [사진출처 : 현충사관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