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연구

국가유산이야기

장도장 박용기
발행일 : 2021-01-22 조회수 : 4516
장도장 박용기

1931. 6. 19. ~ 2014. 6. 9 | 보유자 인정: 1978년 2월 23일

위대한 국가유산
국가유산진흥원의 국가무형유산이야기
장도장 박용기

국가무형유산 장도장
Master Artisan of Ornamental Knife Making

당신은 여린 나의 몸에 강철날을 박더니 수없이 달구고 식혔습니다.

당신은 나의 몸을 줄로 다듬고 숫돌에 갈아 날을 벼렸습니다.

당신은 나의 얼굴을 문질러 윤을 내더니 옆구리엔 태양을 새겼습니다.

당신은 나를 옷섶에 차고 다니며 어루만집니다.

나는 당신이 손에 쥘 때에는 부드럽지만 다른 사람이 닿으려하면 날카로운 날로 위협합니다.

만일 누가 당신을 해치려하면 나는 당신을 지킬 거여요.

만약 당신이 자신을 지키지 못하게 되거든 나로 하여금 당신을 찌르게 하셔요.

당신을 찌르는 아픔에서 당신을 빼앗기지 않고 당신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나에게 주셔요.

나는 당신의 은장도여요

- 황건, <은장도> 계간 시와시학사, 2005, 봄호

성인 남녀의 필수품이었던 장도

전통사회에서 장도는 성인 남녀 모두가 몸에 지니던 필수품이었다. 은장도가 여성의 정절을 상징하는 것으로만 알려졌으나 사실은 바깥출입을 하거나 소소한 집안일을 하는데 있어서 장도는 가장 요긴한 연장이었다. 야외에서 나뭇가지를 다듬어 젓가락을 만들기도 하고, 과일을 깎는 데도 쓰였다. 신분에 따라 재료와 만듦새가 다르고 격조를 달리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나, 크게는 일상용이 있고 노리개에 붙이는 것처럼 장식기능을 우선하는 것이 잇다. 장도 가운데는 쇠젓가락을 장도날과 함께 꽂아 두어 쓸모를 배려한 물건이 적지 않은 것은 일상에서 장도가 얼마나 요긴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장도(粧刀)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하는데,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찬다하여 패도(佩刀)라 하였으며,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하여 낭도(囊刀)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언제부터 패용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최남선은 남녀가 옷고름에 장도를 패용하는 관습이 고려시대 원(元)에서 전파된 몽고의 풍속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후 장도의 유래를 몽고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글들이 있으나, 신라의 요패 장식물의 하나인 장식칼과 금령총에서 출토된 순금의 작은 고리칼(小型環頭大刀)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작은 칼을 제조했다는 기록을 보아, 장동와 같은 칼의 형태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고려인들의 오랜 풍습 중에 칼과 붓이 함께 달린 칼을 차고 다닌다는 기록과 백성들에게 비수(匕首)차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은 장도의 형태와 유사한 칼을 항상 소지하고 있던 풍습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만 문헌상에서 그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조선전기이다. 「경국대전」에는 도자장(刀子匠) 6명과 환도장(環刀匠) 12명이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있음을 기록하고 있어, 칼을 만드는 장인이 중앙에 소속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도자장은 작은 손칼을 만드는 장인을, 환도장은 군도(軍刀)를 만드는 장인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장도는 장신구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도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던 장신구로써 거울이나 빗과 함께 여인들의 3대 소지품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장도는 여인의 정절을 지키는 상징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화 이후 장도의 패용이 점차 줄어들고 서양에서 건너온 손칼의 보급 등으로 장도의 이용이 줄면서, 장도를 만드는 장도장의 수도 감소하게 되었다. 1978년 2월 23일 국가지정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장도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마침내 이루다. 박용기 선생

박용기 선생은 1931년 6월 19일 광양읍 우산리에서 아버지 박순경 선생과 어머니 김수연 여사 사이에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광양은 선생의 5대조 이래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유년시절은 집안이 부유한 편이어서 학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나 선생은 공부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했다. 아버지는 투전을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는데 투전의 문양을 고르게 인쇄하는 기술은 감탄할 정도였고, 대나무를 이용하여 갈퀴와 빗 등도 직접 제작하는 등 공예기능이 탁월했다. 부친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은 선생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작시간에 가장 큰 흥미와 재능을 보였다. 선생이 장도를 처음 접한 것은 광양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되던 해에 고종누님의 시댁어른인 장익선 선생을 만나면서였다. 당시 70세였던 장익선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장도장의 맥을 이어왔던 분으로, 누님의 부탁으로 장도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승인 장익선 선생이 73세(1948년)에 돌아가신 뒤에도 스승의 공방에서 계속 일을 하다가 우산리의 큰집 갓방을 얻어 독립했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22세 되던 해에 결혼을 하고 제대 후 형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전주에서 잠시 자동차 운수사업을 했으나 3년만에 실패하고 광양으로 돌아와 다시 장도일을 시작했다. 60년대 초반 무렵, 9명의 종업원을 두기도 하며 광양읍내에서 ‘패도공업사’ 간판을 걸고 시작했다. 장도제작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60년대 말붜는 아접도(눈목칼), 뽕낫 등 농기구를 제작하여 가계를 꾸리기도 했다. 이 일도 실패한 뒤에는 오로지 장도제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선생에게 1970년대는 장도 기능이 무르익어 경지에 올랐을 때다. 또한, 장도제작의 열정 뿐 아니라 장도의 홍보와 판매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975년(44세)에는 광양읍에서 패도공업사를 처분하고 현재의 광양 장도박물관 위치로 공방을 이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로 1978년 2월 23일 장도장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75년에 현 위치로 공방을 확장하면서 훗날 광양에 장도박물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가졌고, 선생의 모든 재산을 광양시에 기부채납하는 조건으로 2005년, 마침내 박물관 건립이 현실화 되었다. 2010년 12월 28일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보유자의 반열에 올랐다. 2014년 향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선생의 장남인 박종군 선생이 대를 이어 2011년 장도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되어 활발한 작품활동과 전승 활동을 하고 있다.

어느 장도든지 일편단심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요. 평생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겠지요. 그래서 선비에게는 불사이군, 즉 두 임금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되어서 충절도가 되는 것이지요. 시잡가는 여자에게는 두 남자를 섬기지 말라는 뜻이니 정절도가 되는 것이고, 작은 것은 노리개로 앞가슴에 품기도 합니다만 선인들은 정절과 충절을 간직하는 정신으로 늘 장도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 한국경제신문 1989.11.19

나는 지금까지 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장도를 제작해 왔다. 장도에는 ‘바로 사는 도덕’이 들어있다. 우리가 지금 우리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 모습뿐이지 않는가. ‘문화’속에는 그 나라의 민족성이 들어 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장도에도 우리 선조의 지혜와 정신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 광주일보 2004.4.7

작품

금은장매죽문첨자도 20x3.5cm금은장매죽문첨자도 20x3.5cm
금은장매조문갖은을자도 15x2cm금은장매조문갖은을자도 15x2cm
금은장용문갖은맞배기도 21.5x3cm금은장용문갖은맞배기도 21.5x3cm

작업도구

장도에 사용하는 금속재료로는 금, 은, 백동, 구리, 주석, 철 등이 있다. 금, 은, 백동, 구리 등은 주로 칼집과 칼자루를 만드는데 사용하고, 주석은 도신(刀身)의 도심(刀心) 부위의 받침 역할을 하는데 많이 이용하며, 철은 연마하여 도신(刀身)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나무재료로는 흑단, 먹감나무, 대추나무, 향나무, 대나무, 심향목 등이 사용되고 기타 옥, 호박(琥珀), 비취, 마노(瑪瑙), 공작석(孔雀石) 등의 보석류와 대모(玳瑁), 우골(牛骨), 어피(魚皮) 등의 동물에서 추출한 재료들을 사용한다. 제작도구로는 금속을 열풀림하거나 녹이는 기능을 하는 화덕과 화덕에 공기를 주입시켜 불의 온도를 강약으로 조절하는 풀무, 장도의 장식과 부속품의 형을 잡는데 사용하는 보래를 비롯, 거도, 토간, 모루, 물줄이, 쇠망치, 줄, 활비비, 받침대, 다듬목, 숫돌, 정, 가위, 집게, 칼대와 칼대받침목, 연장칼, 대패, 국화정과 납통, 불살개, 찌구, 나무망치, 도심꼬지, 깍쇠, 길이, 납인두, 갈기, 거름쇠, 실톱 등 다양한 도구들이 사용된다.

1. 화덕에 강철을 달구는 모습

1. 화덕에 강철을 달구는 모습

2. 달구어진 강철을 단련하고 칼날 형태잡기

2. 칼날 형태잡기

3. 장도장 박용기 칼날에 명문 새기기

3. 칼날에 명문 새기기

4. 칼자루에 칼심 박기 전

4. 칼자루에 칼심 박기 전

5. 장도장 박용기 칼을 칼집에 넣는 모습

5. 칼을 칼집에 넣는 모습

작은 칼에 우아함을 담다- 국가무형유산 장도장 보유자 박종군 1부


(박용기 선생의 아들인 박종군 선생의 영상)


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 자료그 옛날 충절과 절개, 그리고 정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었던 장도.시대가 변함에 따라 찾는 사람은 크게 줄었지만 -보유자 모습대를 이어 장도를 만드는 장도장 가문이 있다.
# 시연 그 옛날 선조들의 방법 그대로 -삼부자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다시 그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장인의 혼...그 소중한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심에 장도장보유자 박종군이 있다.
타이틀 // 작은 칼에 우아함을 담다 1부 장도장 보유자 박종군
장인의 삶
# 박물관 외경전라남도 광양에 위치한 국내유일의 장도박물관.
# 출근하는 장인바지런한 발걸음으로 박물관의 문을 여는 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보유자이자, 박물관 관장인 박종군씨다.
이곳은 2006년 1월, 평생 장도장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께서 자신이 만든 장도 3백여 점과 전 재산을 광양시에 기부 체납하여 설립했다.
# 아버지 자료1대 보유자로, 65년 세월을 한결같이 장도 만드는 일에 매진해온 박용기 옹.
그런 아버지와 살다보니 외아들 박종군은 자연스럽게 장도장의 길을 걷게 됐다.
# 작업장 삼부자1대가 수십 년간 써온 도구들은 2대와 함께 어느덧 3대의 손에도 쥐어졌고, 부자는 작업장에서만큼은 엄격한 스승과 제자로 만난다.
-보유자sov
/깔짝깔짝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만들 거야. 젊은 놈이 나이 먹은 사람처럼 깔짝깔짝 댈거야
-큰아들 int
/엄하긴 하면서도 장난기가 많으신 분이죠. 그냥 재밌으신 분이세요.
# 삼부자
미대에 진학하면서 장도를 전수받기 시작한 큰아들 남중이와, 이제 막 미술공부를 시작한 중학생 건영이는 든든한 후계자다.
# 박물관 외경이처럼 가업 전승과 박물관 운영에 있어서 가족의 협업은 필수.
# 칠보공예 하는 아내 칠보공예 솜씨가 뛰어난 아내는 장도제작에 필요한 장식은 물론, 문화상품 개발에 힘을 쓰며 내조의 여왕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부부 sov
/어떤 거야 내가 부탁한 거? 이거 아니야 혹시?/ (듣고)
아내에게 장도 전시준비에 필요한 소품을 부탁했던 장인.
~~~ 나 이거라곤 안했잖아 내꺼부터 빨리 해달라고 했지. 저는 문화상품 먼저 개발한 다음에 해야지 난 바쁜 사람이야/ (듣고) 그런데 아내는 언제나 문화상품 개발이 우선이다.
아니 관장님 저희들도 먹게 살게요.
판매하는 게 문제지 지금꺼... 다음 주에 해드릴게요
-아내 int
/먹고 살아야 되니까.. ~~ 먹고 살아야죠. 그게 중요합니다.
# 부부 오로지 장도만 신경 쓰는 남편과 박물관 운영과 생계를 걱정하는 아내 사이에 종종 있는 마찰이다.
- 돌아서 나오는착잡한 마음에 박물관을 나서는 장인. 바람이나 쐴 참이다. -장인 int
/지금은 한 건물 안에서 같은 일을 해야 되니까 많은 생각의 차이가... ~~하지만 또 그것이 발전입니다
# 아내와 직원들여자들의 스트레스 해소는 역시 수다가 최고 아니겠는가.
관장님 험담에 직원들까지 웃음꽃이 핀다.
-아내 sov
/우리 오늘 외식할까...~~ 차는 이미 관장님이 좋아하는 횟집으로 가고 있어 왜 그런지 모르겠어. 관장님이 너무 독재주의가 너무 심해 우리 집은/
친화력 좋은 장인의 캐릭터
# 순천 문화의 거리 순천 문화의 거리에 등장한 장인.
(악수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하는 장인은 사람 좋기로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다.
-상인 int
/~~~정말 핸섬하시고 점잖으시고 좋으시네요/
# 골동품 가게로 가는 오늘 꼭 들려보고 싶은 곳이 있었으니 바로 골동품 가게.
-장인/ 우리 한국장도나 다른 장도 나와 있는 거 있습니까?
-주인/ 그렇게 좋은 건 없어도 몇점 있어요
# 진열장 줌인 될 때이곳에서 우연히 보물을 발견했다.
-장인 sov
/지금 보면 빨간색 대추나무.. 이것은 아버지가 1960년대에 만드신... ~~이때는 코를 살짝만 잡아줬어요
# 손님들때마침 가족손님이 골동품을 구경하러 들어오고.
-장인 설명해주는친화력 좋은 장인의 성격이 빛을 발해 즉석 강의가 이뤄진다. 언제 어디서든 장도알림이로서의 소명도 다하고 싶은 것이 장인의 마음이다.
# 거리공연. 장인으로 pan하고
거리공연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이렇게 여러 문화예술을 보고 느끼는 것, 또 많은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중요하다는 장인. 그것이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장인 int
/나도 살아야죠. ~~이런 맛없으면 어떻게 장인합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 빠져나와서 와이프에게 미안하거든요...주특기 목살 사서 주물럭거려서 고기를 구워줘야겠네...안 그러면 나 쫓겨나요 집에서.
# 장인 뒷모습과묵함 속에 숨겨진 가족 사랑을 -가족 풀샷손수 준비한 저녁식탁에 담아내는 장인.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장인 int
/가끔가다 하는 특별 요립니다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에요 이게
# 큰아들 혼자 그런데 큰아들 남중이에게 무슨 고민이 있을까?
# 가족들. 서성이는 큰아들 식사시간 내내 왠지 혼자 겉도는 분위기.
결국 젓가락마저 놓아버렸다.
# 밤. 그날 밤.
박물관 한편에 둥지를 틀고 있는 생활관.
장남의 갈등
# 방에 두 아들저녁식사도 제대로 못한 남중이에게 속내를 물어봤더니, 사실 따로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단다. -아들/ 요리요 요리!
# 장인 하지만, 아들의 마음을 알아챈 장인의 생각은!
-장인/ 요즘 시대 한가지 집중해도 완성도 꿈을 이루기가 참 힘든 세상인데 # 큰아들 장인이 가장 믿는 후계자 3대 장도장은 지금 갈등하고 있다!
-아들/ 제가 하고 싶은 거 할 시간이 필요해요

약력

  • 1931년광양 출생
  • 1971년관광민예품 경진대회 입상
  • 1973년인간문화재공예전 장려상
  • 1978년국가무형유산 장도장 기능보유자 인정
  • 1981년롯데백화점 롯데미술관 초대전, 부산 국제화랑 초대전
  • 1984년~1985년광주 장도 상설전
  • 1987년KBS 순천방송국 개국초대전
  • 1988년문공부 주최 해외전람회
  • 1989년한국전통보석 장신구 특별전
  • 1990년일본 한국공예전람회
  • 1991년미국 캘리포니아 피사데나센터 전시
  • 1993년대만 주최 국제 전통공예 대전, 대전 엑스포 전통공예관 장도제작 실연
  • 1995년광주비엔날레 찬조출품
  • 2000년~2005년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 찬조출품
  • 2005년광양장도박물관 설립, 전수교육관 설립
  • 2010년국가무형유산 장도장 명예보유자 인정
  • 2014년별세
  • 글 이치헌 / (국가유산진흥원 전승지원실장 /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 저자)

  • 사진 서헌강(문화재전문 사진작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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