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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배뱅이굿 ‘이은관’ 편 (3) - 문화재가 된 ‘배뱅이굿’
작성일 : 2022-12-06 조회수 : 694
이은관 육성 //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뭐 이런 얘기 있잖아요. 늙으니까 그런 생각이 나요. 나 죽은 다음에 이거 남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젊어선 그런 생각 못 했는데요. 내가 늙고 보니까 그래도 지금 한 가지라도 더 내놓고 내가 가야 되지 않느냐?”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서도소리 배뱅이굿, ‘이 은 관’.
제3화, 문화재가 된 배뱅이굿.

나레이션 // 이 프로그램은 국립무형유산원에서 구술 채록한 자료를 바탕으로
EBS가 오디오 자서전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
#1. 1951년 한국전쟁, 명동성당

(한국전쟁 당시 폭격, 총소리 등)

이은관 육성 // “대한국악원에서 그쪽 사람들이 넘어가지고 거기다 부탁했거든요. 소리 잘하는 몇 사람만 보내달라고. 그때 열 명인가 뽑혔어요. 뽑혀서 어디를 갔냐 하면 명동 뾰족당. 거기는 미군이 폭격을 안 하거든요. 거기 한 연예인 백 명이 들어가요. 가요하는 사람, 연극쟁이, 성악쟁이, 무슨 국악하는, 국악도 몇 사람뿐이 없어. 나 이름 다 잊어버렸는데요.”

(멀리 총성 소리) (사람들 웅성대는 소리)
30대 이은관 // (불안한 듯) 아니, 박천복이 자네도 왔나.
박천복 // (걱정과 두려움) 이보게, 은관이. 이게 무슨 일인가.
도대체 6.25 전쟁통에 뭘 하라는 건지.
심영 // 자자. 이제 다 모였지요?
저는 ‘인민군 내무성협주단’의 단장, 배우 심영입니다.
군의 사기를 높일 위문공연에 힘을 모읍시다!

노년 은관 // 말하자면 군악단이었죠.
오래전 일이지만 기억이 또렷하네요.
그때 난 어쩔 수 없이 차출되어 대전 거쳐 광주까지 다녀왔지요.
다시 서울로 왔더니 이젠 북으로 후퇴하는 길에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걷다 보니 강원도 이천 고향 집이 보이는 겁니다.

30대 이은관 // (속말) ‘여기서 도망갈까?
아니야. 잡히면 죽을 수도 있어. 어쩌지?’

노년 은관 // 결국 고향 지나 평안북도 어딘가에서 탈출했습니다.
남쪽을 향해 걷다가 미군을 만났지요. 트럭에 타라고 하더군요.
서울에 데려다주나 했는데, 눈 떠보니 부산 포로수용소였어요.


< 포로수용소에서 소리로 살다 >
#2. 1953년 겨울, 한국전쟁, 부산 포로수용소

(찬 바람 쌩쌩 부는 소리)

30대 이은관 // (아픈) 아이고, 아이고 배야.
포로 // 어쩐 지 냄새가 고약하다 했더니, 이질에 걸렸구만.
30대 이은관 // (힘없이) 이 포로수용소에서 내가 과연 살아나갈 수 있을까?

노년 은관 // 따뜻한 난로 옆에 가야 나을 것 같은데
제가 누운 바닥은 차디찼지요.
살고 싶고 가족이 보고 싶어 용기를 냈습니다.

30대 이은관 // (소리치며) 저는 소리허는 이은관입니다.
미군 대장님을 모시고 소리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은관 서도민요 中)

노년 은관 // 죽을 힘을 다해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대우가 달라지더군요.

관리원 // 야, 난로 옆에 거기, 넌 저기로 가고
소리허는 이은관, 니가 난로 옆으로 가!

노년 은관 // 소리로 목숨을 구걸하구, 구한 겁니다.


< ‘민요만담’의 인기 -> 극장 공연 –> 레코드 취입>
#3. 1950년대, 재혼한 서울집

(배뱅이굿)
아내 // 당신, 오늘은 어디서 공연해요?
이은관 // 당신이 내 공연 처음 보러왔던 게 광무극장인가, 동양극장인가.
오늘은 동양극장에서 ‘배뱅이굿’ 또 해야지.

노년 은관 // 두 번째 만난 그 사람과는 극장서 만났습니다.
제 팬이었지요.

아내 // 당신이 너무 바빠져서 요즘 얼굴도 잘 못 보네요?
이은관 // ‘민요만담’ 인기 덕분에 극장 공연이 많아졌어.
장소팔, 고춘자랑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후로 말야.
전주, 광주, 대구, 부산, 울진, 강원도까지 전국을 다니네.
아내 // 이 레코드판도 잘 팔린다면서요?
이은관 // 내 평생 소원이 말야. 레코드에 내 목소리가 실리는 거였지.
특히 두 번째 ‘배뱅이굿’판은 서도소리만 녹음해서 흐뭇해.

이은관 육성 // “<배뱅이굿> 처음에 레코드판이 나와서 예를 들어 한 곳에 틀어놓고 마이크 큰 거 하나 달고 동네에서 그랬습니다. 그 운동장에서 공짜로 하는데 운동장이 가득 차다시피 했어요. 여름철인데.”

(배뱅이 굿)

노년 은관 // 그 후로도 장소팔 일행과 공연을 다녔지요.
허지만 방송이나 행사에서 전 소리만 했습니다.
1961년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찍었던 ‘민요잔치’에서도
만담 따로, 소리 따로 구성이 됐어요.
자,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부터 시작합니다.

(문화영화 ‘민요잔치’ -장소팔, 고춘자 만담)
장소팔 // 산 높고 물 맑길래, 금수강산이라고 하길래 나는 산수만 화려한 줄 알았더니 아가씨들의 얼굴도 또한 아름답게 생겼군요, 모두.
고춘자 // 참,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에서 선생님 사시는 고장이 어디세요?
장소팔 // 나 참 좋은 데 삽니다.
고춘자 // 어디인데요?
장소팔 // 우리나라에서 이름 높고 그리고 경치가 무척 좋은 저 진주에 산답니다.
고춘자 // 오마나, 좋은 데 사시네요. 진주에는 촉석루가 있다죠.
장소팔 // 아, 촉석루뿐이겠어요. 우리나라에는 루가 많습니다.
고춘자 // 무슨 루가 그렇게 많아요?
장소팔 // 진주에는 촉석루가 있고 남원에는 광한루, 그리고 밀양에는 영남루, 뚝섬 옆에 광한루 그리고 텅 빈 쌀자루, 대국 타운 밀가루, 그리고 김장 때 고춧가루, 그리고 꽁무니에 찬 타워루.
고춘자 // (웃음) 정말 그러고 보니까 루가 많군요.
장소팔 // 루만 많은 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라는……

노년 은관 // 만담 바로 뒤에는 ‘KBS국악연구회’와 함께 부른
‘뱃노래’가 이어집니다. 마흔 즈음이었나, 젊을 적 목소리예요.

(문화영화 ‘민요잔치’ -이은관, KBS국악연구회 ‘뱃노래’)


< 영화 찍고, 교포 위문공연 가고, 서양 악기 배우고 >
#4. 1957년 개봉 이후, 서울 고려영화사 사무실

(문 노크하는 소리) (문이 열리며)
이은관 // 안녕하세요? 양주남 감독님.
감독 // (반기며) 아이고, 우리 이은관 주연배우님 오셨습니까?
이은관 // 아직 배우로는 신인인데 부끄럽습니다.
하긴, 제가 박수무당 역을 했으니 주연은 맞네요. 하하.
감독 // 그럼요. 영화 더 찍으셨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배뱅이굿> 영화가
흥행이 젤 잘 됐을 겁니다.
이은관 // 알지요. 영화 음악 레코드판만 6만 장 이상이 팔렸다네요.
감독 // 요즘 라디오방송에도 자주 나오시던데요~
그리고 일본서 열리는 아시아영화제에도 가신다고요?
이은관 // 네, 영화제에도 참석하고 재일교포 위문공연도 합니다.
요즘 좀 이리저리 불려 다니네요.

이은관 육성 // “아시아영화제 갔어요, 그때는. 그때 영화배우도 가고 딴따라가 이은관이에요, 후라이보이, 황금심 씨, 백설희 씨, 황금심 남편 고복수 씨 이렇게 갔어요. 가가지고 나는 그때 영화에 나왔지만 무슨 영화배우로 뽑힌 건 아니죠. 그거 시킬라고 데리구, 교포 위문할라고 그때 처음 갔어요, 일본에.”

#5. 1960년대, 일본(재일교포 위문공연)

(종이 만지작 거리는 소리)
직원 // (악보 들고선) 이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서울서 써온 악보가
원래 조로만 되어 있어 못 쓸 것 같아요.
어쩌죠? 여기 일본인데...
이은관 // 이리 줘보게. 내가 함 고쳐보겠네.

노년 은관 // 전 소리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 목소리 톤을 알거든요.
그래, 편곡을 해서 악보를 다시 고쳐줬습니다.
군악단 시절에 악보를 쓱 한번 보더니 노래 지도하는
여성을 보고 ‘아 저런 게 있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서양악기를 배우고 편곡하는 걸 배웠지요.

(이은관 색소폰 연주)

노년 은관 // 그때 공연 다니면서 색소폰으로 가요도 많이 불렀어요.
소리만 해서는 밥벌이가 힘들었거든요.

이은관 육성 // “쉬는 시간에 모두 다방에들 나가고 그래서 낮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하는데 쉬는 시간에, 그때는 다방이 많았습니다. 다방에 들어가면 나는 그거를 불어봤어요. 그 색소폰을.”


<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 >
#6. 1970년대, 서울 집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
이은관 // (힘없이 들어오는) 여보, 나 왔어요.
아내 //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안색이 안 좋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은관 // (진지하게) 어쩌면 난 명창들 사이에선 이단아가 아닌가 싶네.
아내 // 왜요? 또 뭐라고들 해요?
이은관 // 소리꾼이 만담을 허고, 배우를 허고, 색소폰을 불고 허니.
다들 뭐라고는 하지.
아내 // 당신은 허고 싶은 것도 많고 재능이 많아서 그래요.
이은관 // 그런데 내가 무형문화재에 거론이 됐대.
아내 // (기대하며) 그럼...?
이은관 // 아니. 혹시나 했지만 안 됐어.
문화재 위원들이 “이은관이 하는 소리는 소리답지 않다.
그걸 문화재로 지정해줄 수가 없다” 그랬다는 거야.
아내 // 여기 종로에 학원도 열어서 제자들을 키우고 있잖아요.
서도소리 계승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요.


#7. 1970년대, 종로 이은관 학원

(이은관의 서도소리 中 ‘수심가’)

이은관 // 아이고, 김천흥 선생이 저희 학원까지 와주시고 감사합니다.
김천흥 // 이 선생님, 내 안타까워서 왔습니다.
지난번 문화재 지정할 때 성경린 선생님이
“그래도 이은관이 소리는 문화재감”이라면서 지지해줬지만
결국 안 됐잖아요.
이은관 // 그 이후로 많이 생각했어요.
일생을 소리꾼으로 살아왔는데
문화재로 지정이 돼야 최고로 인정받는 게 아닌가...
김천흥 // 그러니 이제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면
서양 나팔 같은 거 쇼할 땐 불어도
텔레비전에선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은관 육성 // “그 문화재 위원들은 그거를 모르거든. 내가 진수, 정말 옛날 소리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걸 모른다? 당연한 얘기고. 또 그래서 내가 발표할 적에 그야말로 참 열심히 했고 <공명가>, <초한가>, <수심가>, <엮음수심가> 그분들한테 내가 옛것을, 나도 옛것 전통을 이만큼 가지고 있다 하는 걸 내가 자랑하고 발표를 해야 그분들이 나를 인정해줄 거 아니냐. 그래서 이제 했죠. 나는 일생을 소리꾼으로서 소리하는 사람으로서는 문화재 지정을 받아야 최고 아니냐.”


< 문화재된 된 배뱅이굿 >
#8. 1984년, 종로 이은관 학원

(이은관 배뱅이굿)

노년 은관 // 예순여덟이 되던 1984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이 됐습니다.
세부 종목은 <배뱅이굿>이었죠.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날이 내 생에 가장 좋았던 순간입니다.

제자(남) // (놀라고 기뻐서) 선생님, 여기 신문 좀 보세요!
서도소리 보유자라고 선생님 존함이 찍혀 있습니다.
제자(여) // (울먹이면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드디어 이루셨어요.
이은관 // 고맙네. (힘주어서) 이제는 자네들 세상이네.
시대에 맞는 자네들 목소리로 ‘배뱅이굿’을 이어가야지!


< 98세를 일기로 별이 된 낭월 이은관 >

(이은관 영결식 상여 소리)

나레이션 // 우리 가슴 깊은 곳을 소리로 어루만져온 낭월 이은관.
그 98년의 인생은 오로지 소리로 이어져
서도소리 보유자로, 배뱅이굿의 대가로 남았습니다.
소리는 이은관의 전부였습니다.

< 마무리 코너 – 덧붙이는 이야기 >


(징소리)

나레이션 // ‘덧붙이는 이야기’

(이은관 - <배뱅이굿> 왔구나~~)

나레이션 // 지금 여러분은 서도소리 배뱅이굿 보유자 이은관 선생이 만든 신민요 연평도 사공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이은관 선생을 극진히 모신 김경배 보유자와 양진희 제자 두분과 함께 부르는 노래를 듣고 계십니다.
국악을 하면서도 서양 음악을 배워 신민요를 작곡한 낭월 이은관은 우리 국악의 지평을 한 단계 올렸다고 제자 김경배 보유자는 이야기합니다.

김경배 // 시대를 앞서가신 거예요. 생각을 선생님이 50년, 60년 내다보신 거죠. 앞을 내다 보고 그때 작곡을 하시고 곡을 쓰신 거예요. 신민요 쓴 것도 한 스물 몇 편 되는데 지금도 내가 부르고 다니잖아, 공연할 때. 이거는 이은관 선생님이 배뱅이굿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하나 저한테 또 주고 가셨어요. 연평도 사공이라고 그거를 꼭 불러요. 선생님 보고 계시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 // ‘배뱅이굿 보존회’의 이사장이기도 한 김경배 보유자는
이은관 선생이 남긴 배뱅이굿 유산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을까요?

김경배 // 돌아가시고 나니까 더 열심히 배울걸. 열심히 배웠어요. 나같이 열심히 배운 사람 없어요. 그렇게 열심히 배웠는데도 또 뭔가 아쉬운 거야. 뭔가 더 배웠으면, 이런 생각을 가졌는데. 완벽하게 승화를 시키고 돌아가시지 않잖아요, 이 전통 예술이라는 게. 또 남아서 후배가 이어가는 거고. 그래도 뭔가 더, 조금 더 이렇게 가지고 있는 걸 내가 빼냈으면,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도 섭섭하죠. 그래서 지금도 선생님 테이프 듣고 판 듣고 해서 연구를 해요.
그 왔구나가 여러 가지입니다. 살아생전에도 여러 가지로 가르쳤어요. 왔구나~~ 이렇게도 가르치고, 왔구나! 이렇게 가르치고, 왔구나~! 이렇게 가르치고. 여러 가지로 가르쳐요. 그거는 목에 따라서, 사람이나 목 잘 나갈 때는 그렇게 하고 이게 노인네들 가서 하는 행사냐, 젊은 애들 하는 행사냐, 이게 남도 지방 가서 하는 거냐, 경상도 지방 가서 하는 거냐, 강원도 지방에 가서 하는 거냐. 다 달라요, 쓰는 목이. 그렇게 배웠죠, 선생님한테.

나레이션 // 다큐드라마 문화가 된 사람들,
서도소리 – 이은관, 세 번째 시간.
지금까지 극본 김정연, 연출 권윤혜,
출연 구자형, 이서윤, 이기호, 전해리, 한만중, 김단,
음악 윤아성, 음향효과 이용문, 기술감독 조성도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의 제작비 지원,
국립무형유산원의 자료 지원으로 EBS가 기획, 제작하였습니다.
요약정보

타고난 재능만이 아닌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으로 고난에 굴하지 않고 일평생을 소리에 쏟아부어 서도소리 보유자와 배뱅이 굿의 대가가 된 이은관의 생애를 다룬 오디오 다큐드라마.

* 국립무형유산원의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채록사업’에서 확보한 자료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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